세상을 관리하는 사람들과 삶을 사는 사람들
발전노조 운동과 대선 후보 경선이라는 두 흐름의 정치
나는 60년대에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 때에는 오직 왕조사만이 역사인 것 같았다. 그래도 대학에 다니게 된 80년대에는 역사에 대한 여러 각도의 조명이 시도되면서 소위 민중사라는 것이 우리 입에 오르내렸다. 그래서 하여간 세상을 관리하는 입장이 아니라 세상을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람 살아온 이야기를 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은 관리자의 입장만이 현저하다.
역사를 민중의 입장에서 보겠다는 입장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오늘의 사회를 민중의 입장에서 반추하는 입장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른바 왕조사라 할 만한 관리자들의 정치에는 멍석까지 깔아주지만, 민중사라 할 만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정치에는 오히려 탄압이 여전하다. 근래 한 달이 넘도록 발전 노조의 산개투쟁이 전개되었다. 조별로 흩어졌다가 지시가 떨어지면 다시 모이는 이 산개 투쟁에서 발전노조원들은 거의 난민 수준의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들도 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이 산개 투쟁을 하는 한 조를 만난 적이 있어서 그들의 고통과 분노를 느껴 본 바가 있다. 그런데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이 계속되었다. 색깔 논쟁이 있기는 했지만, 이 후보들은 온 나라가 깔아준 멍석 위에서 한껏 뛰어다녔다. 그리고 그 추이도 좋은 편이어서 정치판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한 것으로 안다. 요즈음 우리에게는 발전노조 운동과 대선후보 경선이라는 두 흐름의 정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정치의 두 흐름이 처지에 있어서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민중사가 어쩌고 했던 것의 열매를 달콤하게 느낄 수 있는 정치의 계절은 정녕 오지 않을 것인가?
아마 지금의 대통령은 결국 일등이라야 살아 남고 오직 경쟁력만이 중요하다는 철학을 발전노조와의 줄다리기에서 고수하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생각해 보면 그도 그리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겠으나, 그가 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그렇게 세차게 저항하였던 박 전 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은 논리라는 생각을 하면 실소가 난다. 그 수십년의 투쟁은 오늘 무엇을 낳았는지, 그리고 진정으로 우리는 무엇으로 이 땅의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길이 희미해진다. 선진화라는 너무나 현실적인 명제를 현정권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 발전노조의 인간화 정신을 외면하기로 한 모양이다. 아마 그들도 가슴은 좀 쓰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단지 목사의 순진함은 아니겠지?
그들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하여도 그래도 끝까지 남는 생각은 그것이다. 시대마다 살아남는 방법이 달라진다 하여도, 소위 효율성과 선진성을 추구하는 세력과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세력은 언제나 투쟁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그리고 그 효율성의 사도들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삶을 관리하고 있고, 그래서 국가도 관리하고 있다. 나는 내가 만났던 발전노조원들에게 들었다. "저희는 그 동안에 너무 고생했습니다. 석탄가루도 마셨습니다. 그런데, 낙하산 인사나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고생한 저희들에게 책임을 물으면서 구조조정이니 민영화니 하는 말을 합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라도 바로 잡고 난 뒤에 해야되는 것 아닙니까?" 발전노조원들은 삶을 관리했던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 삶이 관리의 논리 앞에서 무너진다는 것이 그들의 절망이다.
발전소 민영화의 문제를 국민에게 알린 것이 성과라고 발전노조 이호동 위원장은 말했다. 확실히 그것은 성과였다. 그러나 짓밟힌 삶은 다시 응어리져서 그 어딘가 잠복할 것이다. 이 삶의 논리와 민중사의 흐름은 다시 어디에선가 솟아오를 것이다. 며칠 못하여 솟아오를 수도 있다. 우리는 새 대통령을 기다리듯 그 삶의 부활을 기다려야 한다. 이 땅에는 관리자의 정치와 삶을 사는 사람들의 정치가 항상 그렇게 뒤대이면서 흘러가고 있다. 발전노조 활동의 참된 성과는 바로 그런 대조, 대립, 투쟁을 알려준 것이다. 발전노조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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