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저널

칼럼   특별연재(지구온난화)   환경   선거일기   의학칼럼   기고   음악칼럼   산행기행   영화칼럼   유종필의관악소리   교육특별연재   신년사
호별보기 로그인 회원가입
컬럼
칼럼
특별연재(지구온난화)
환경
선거일기
의학칼럼
기고
음악칼럼
산행기행
영화칼럼
유종필의관악소리
교육특별연재
신년사
개인정보취급방침
회사소개
광고/제휴 안내
기사제보
컬럼 > 컬럼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속으로 곪아가는 학교 현장
기사입력  2007/05/15 [00:00] 최종편집   

속으로 곪아가는 학교 현장
윤여천 본지 대표이사

모 중학교의 3학년 교실에서 ‘잠자고 있는 남학생’을 깨우는 여선생님에게 ‘왜 깨우느냐’고 큰 소리로 상스런 욕을 하면서 교실을 나가버리는 일이 생겼다. 이 여선생님은 반 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욕을 하면서 교실을 나가는 학생을 제재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도 화가 났지만,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럽다고 했다.

이런 사례는 관악구에 소재한 중학교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으며, 그 강도가 높아지고 있고 점차 초등학교 쪽으로 번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추세를 바꿀 수 있는 대안도, 대책도 지금 준비되고 있지 않고 있으며, 언론은 마녀사냥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학교와 교사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언론과 권력자들의 비난이 ‘교육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교육 문제로 고통당하는 국민들에게, 치료약을 내 놓지 못한 채 진통제를 주사하여 고통을 잊게 하는 식이다.

이러는 동안, 교사와 학생 사이에 가장 중요한 존경과 신뢰의 관계를 그들이 앞장서서 깨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이제 더 진하고 많은 양의 진통제를 주사하기 위해 침소봉대하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죽어가는 사슴을 향해 달려드는 하이에나처럼 언론은 ‘힘없는 학교’를 향해 피 묻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마치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에 물려 죽어가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도록 관중들을 자극하는 것 같다. 그들의 까발리기는 ‘국민의 알권리’라는 미명하에 카타르시스의 해소에 목말라하는 무리들에게 재물로 바치기 위해 더욱 자극적으로 포장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폭로는 지양하는 목표가 있기보다는 찰나적 욕구해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서로 앞 다투어 쓰러져 있는 사슴을 물어뜯는 형국을 연상케 한다. 또한 이러한 부분에 대해 잘 모르던 학생들에게 조차 마치 이렇게 하면 된다는 듯이 ‘자세한’ 내용까지 소개하고 있다. 폭력적인 영화가 유명 감독의 손에서 다루어지면, 마치 새로운 예술의 장르라도 개척한 듯 추켜세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아도 시간이 부족한 지경인데 나팔을 불어서 소란법석을 떨어대고, 우왕좌왕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실타래는 더욱 엉클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이러한 책임에서 예외자로 여기며 멀찌감치 비켜서 있다.

우리는 군사문화의 초법적이고 비정상적인 권위주의를 거부했던 것이지 전통적인 문화와 전통을 따라 내려오는 우리의 정체성 속에 숨쉬고 있는 미풍양속과 규범까지 파괴하자고 주장한 적이 없다.

마치 권위를 몰아내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팡파레라도 되는 듯이, 학교를 피폐화시킨 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권위주의와 권위’의 기본적 차이조차 구분하지 못한단 말인가? 정말 섣부른 의사가 사람을 잡는다고 정교하고 세심하지 못한 비전문가가 교육의 수장을 맡았을 때 얼마나 큰 문제가 발생하는지 똑똑히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교육은 강력한 소신으로 밀어 붙인다고 바뀔 수 있는 분야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학교 현장을 보면 밖으로는 ‘이라크의 무너진 건물더미’이고 속으로는 ‘곪아서 터지기 직전’의 상태이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이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별 힘도 없는 학교 현장을 향해서 지금도 화살 쏘기에 여념이 없다. 이미 일부 선을 넘어버린 학생들의 행태는 ‘정신적 질환’으로 전문가의 치료가 절실한데, 학교가 떠안고 가야 ‘교육적 모본’을 실행한다는 듯이 밀어붙인다.

소수의 폭력적 성향으로 병든 학생들을 제대로 진단하고, 치료하려는 노력대신 교실에 집어넣고 감싸 안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믿고 있다. 그 몇몇 학생들로 인해 수십 명의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위협에 노출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사고에 대한 공포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선량한 다수의 학생들에게도 인권이 있고, 수업을 충실하게 받을 권리가 있다. 국가는 일탈 학생을 인정하고, 원인 규명을 통해 필요한 경우 전문 심리치료를 하거나, 선도할 수 있는 전문 기관을 신설해야 한다.

우리는 문제가 터지면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을까?’ 에 주목하다가 가장 만만한 대상을 선택하여 냄비 끓듯 떠들어대다가 흐지부지 잊어버리는 반면, 버지니아공대 사건을 통해 미국이 보여준 것은 가해자인 ‘조승희’에게 주목한 것이 아니라. 정신병 경력이 있는 사람 등에게 총기를 판매한 제도를 고치도록 승화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사회의 근간과 기초가 되는 전통적 규범을 파괴하고, 시위문화에서 체득한 ‘거스르고, 대들고, 반항하는’ 의식이 비판적 사고이며, 새로운 시대의 문화적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결국 빈대를 잡는다고 나서더니 집을 태워버린 격이다. 힘센 아이가 약한 아이의 장난감을 가지고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다, 고장이 나니까 던져 버리고 가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더 이상 망가지기 전에 멈추어 서서, 조용하고도 차분하게 문제의 실체를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는데 투자해야 할 때다. 불을 지른 놈은 자리를 피해버리고 목숨을 걸고 불을 끄던 사람들만이 다 타버린 ‘낙산사’를 바라보는 격이다.

백 명의 교육학자보다 교실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선생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는 선생님들의 희생과 사랑을 통해 새로운 교육의 희망이 시작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제 언론이나 자칭 교육전문가들은 조용한 조언자의 자리로 물러나 주었으면 한다.

결국 수술실에 들어가는 사람은 의사이듯이, 현장의 교사야 말로 최일선에 서있는 군인이요, 의사며, 상담가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할 때라고 본다. 성경에 이르기를 ‘눈이 먼 자여 너희가 모기는 걸러 내어도, 낙타는 삼키는도다’(마태 23:24)라고 했다.

조그마한 성과(모기)를 얻는 동안 부정한 짐승 중 가장 큰 낙타 즉,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을 잃어버리는 우(偶)를 범하고 말았다. 무엇을 더 잃어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 관악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트위터 미투데이 미투데이 페이스북 페이스북 요즘 요즘 공감 공감 카카오톡 카카오톡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주간베스트 TOP10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 광고/제휴 안내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서울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144길 35 대표전화 : 02-889-4404ㅣ 팩스 : 02-889-5614
Copyright ⓒ 2013 관악저널. All rights reserved.
Contact webmaster@linuxwave.net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