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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기사입력  2007/08/14 [00:00] 최종편집   

(권영출 칼럼)
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보이지 않은 곳에도 귀가 있어서 술김에 지껄인 몇 마디 말 때문에 끔찍한 고초를 당한 사람들이 존재 했던 시절이 있었다. ‘민주’라는 말만 들어도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요동치던 그때에는 화염병조차 정의의 처절한 표현으로 용납되었다. 펑펑 터지는 최류탄 가스에 맞서기 위해 들었던 몽둥이는 최소한의 자기방어 수단이었다. 그 시절의 어그러진 모습은 독재자의 탄압이 만들어낸 기형적 문화였다. 6.29선언을 가져오게 한 것은 화염병이나 몽둥이 때문이 아니었고, 그들의 끈질긴 주장에 공감한 시민들의 동조와 참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도 98년부터 약 3년간 관악산 줄기인 ‘삼성산’ 중턱에 소각장을 짓겠다는 구청과 투쟁을 해 본 적이 있다. 이때 주민들의 권유로 대표를 맡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모든 절차가 민주적이고 공정하게 이루어져서 결정되면 이의없이 동의할 것과 불법적인 시위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적극 동참자들 중에서는 이런 소극적 방식으로는 성과를 얻을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누구도 앞장 설 자신은 없었기에 내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였다. 입지타당성조사위원회에서의 표결은 번번이 8:1이 나왔지만, 실망하지 않고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수 십 차례 시위도 했지만, 주민들은 약속을 지켜주었고 집행부도 최선을 다한 탓에 ‘삼성산 소각장’은 백지화되었다.

화염병과 몽둥이가 없었던 대신 3년이란 긴 시간과 엄청난 자료 확보를 통한 논리 싸움이 계속되었다. 상대에 대한 믿음과 진실의 힘에 대한 신뢰가 없이, 너무 쉽게 불법적이고 과격한 행위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다. 지금까지 그 어느 때보다 합법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시대를 살면서도 ‘불법적 행위’에 의존하려는 집단이 많다. 그 집단의 규모가 크고, 영향력이 클수록 과감하게 불법을 저지르면서 대중 앞에 떳떳이 자신들을 드러낸다. 주장이 정당하다면 절차적인 불법이 용납될 수 있다는 독재시대의 논리에 젖어있다. 그들은 정당한 ‘권위’조차 무시하고, 지위와 역할에 대해 존중하는 것을 가르치기보다, 파괴하고 무너뜨리는데 익숙해있다.

한때, 이 정권의 권력자 중에 한 사람은 ‘학생’들이 교사들의 부당한 행위를 경찰에 고발하도록 권하였고, 이런 행위야 말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길인 듯 호도했던 적도 있었다. 어두운 시절의 비정상적인 사회 속에서 분노와 한으로 가득 찬 ‘정의파’가 권력을 가졌을 때 얼마나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지도 보았다. 불의한 자를 비판하면서 생긴 아집과 독선이 독재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것도 경험했다. 부정과 비리를 너무 많이 본 나머지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버려서 진실한 충고와 조언조차 거부한다. 자신만이 정의롭다는 오만과 저편에 선 자는 다 부도덕하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자가 어떻게 이 땅에 ‘평화’를 가져 올 수 있겠는가?

출애굽을 기록한 성경에서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종노릇하면 고통을 당하는 자신의 백성(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애굽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어른들은 새로운 자유의 땅, 즉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노예로써 먹고, 자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자들이 ‘자유의 땅’에서 새 나라를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그분은 아셨던 것이다. 투쟁을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상대방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삶에 익숙한 그들이야 말로 독선의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아무리 ‘대화와 타협’의 정신을 강조해도 굳어버린 사고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국회를 통해 지겹도록 보았다. 오만과 편견의 노예이면서, 현학적 논리로 무장된 자들이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한 평화는 멀게만 느껴진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법원의 권위는 존중되어야 한다. 탄핵 기각에 대해서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역사적인 판결이라고 환영하던 목소리의 주역들이, 행정수도이전 위헌 판결에 대해서는 180도 돌아서서 헌재의 해체를 주장한다면 이 무슨 코미디인가? ‘법’조차도 자신들의 편에 서지 않으면 비판의 대상으로 몰아버리는 사람들에게 ‘원칙과 상식’을 주장하는 사람이 우스워 보일 것이다. 저질스런 의원 몇 명이 있다고 국회의 권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국회를 부정한다면 그곳에서 입법화된 모든 법률의 효력과 권위도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출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이며, 이런 규칙과 규정을 만든 사람들도 바로 우리들이다. 국회를 욕하는 대신, 훌륭한 자질을 가진 분들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는 풍토를 만드는 일에 쏟아야 할 것이다.

초등학교 학생들조차 학교의 규정을 무시하고, 교사의 정당한 지시를 따르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게 된 배경에는 지도층 인사들의 이런 행태가 영향을 끼친 탓이다. 국민소득 2만 불에 도달한다고 문화 선진국이 되겠는가? 사회 지도층들이 앞장서서 무질서와 혼돈을 조장하는 사회에서 무슨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 사회의 중심축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은, 평범한 시민들의 정신 속에 ‘원칙과 기본’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개혁은 정치인, 지식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6.29 선언 당시처럼 평범한 시민들의 의식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가능할 것이다.

2007년 8월 10일자 재창간 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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