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용서의 미학
나는 이것이 2pm의 노래다 하고 노래를 들어보지 않았다. 단지 누나들도 좋아하는 멋진 소년들의 그룹이라는 말만 들은 것 같다. 그리고 그 멤버인 재범이 한국을 비하하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게 요즘 문제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어디에 그 글이 실렸는지, 그리고 그를 비난하는 글이 또 어디 실렸는지 그것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또 그룹을 떠나서 벌써 미국으로 가버렸다고 하니 대체 이런 일들이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지 참 의아하다.
게다가 사장이라는 박진영씨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무엇보다 가족을 위해 가수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하고, 그러면 그만 두면 안 되는 것이다 싶은데, 박진영씨는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져야 되니 그의 결정을 존중해주자고 말한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그 말에도 귀를 기울이기는 해야 할 것 같다.
정치인들이 조금 용서하는 것을 하지 못해서 큰 분란이 일고 나라가 혼미했던 것이 얼마 아닌데, 말하자면 어리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네티즌들이 분개하고 일어나는 바람에 개인과 그의 소속사에서 탈퇴로 결론을 내린 것 같다.
네티즌들은 용서하지 않고, 소속사는 그 흐름을 지켜보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인간을 없는 채,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그런 결론에 대해서 다시 네티즌들이 분개하고 그런 사실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들이 인터넷에 떠오른다.
내가 궁금한 것은 어리고 젊은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용서가 없나 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민족도 아니고, 그 비하했다는 이야기도 한참이 지나간 이야기라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참기 어려울 만큼 비하한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은 된다.
나는 포스트모더니티가 도덕적으로 말하면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에게 용서를 배워서 지탱시켜 나가는 사회적 현상이라는 급작스런 정의를 한 번 내려 봤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과거의 어른들과는 달리 여러 가지 가능성을 다 인정하고, 그래서 네가 나와 다르다는 것 때문에 모난 눈을 하고 그러지는 않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래야 앞으로의 사회가 무난히 배겨 나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재범이라는 그 가수가 그만 미국으로 가고 말았다. 그가 아무리 반성한다 말하고, 사장은 또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그럴지라도, 그것은 인생의 큰 시련이 아닌가? 그는 또 굳이 찾아온 이 조국 땅을 잘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이렇게 용서하기도 힘들고 용서받기도 힘들고 그러면 우리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앞으로 우리 자녀들이 어른 되어서 살아가야 할 세상이 너무 팍팍해 보인다. 다른 것 아니고 용서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간단한 문제 때문이다.
재범이라는 그 아들 같은 젊은이를 빌미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는다는 것도 실은 죄스럽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용서도 하지 않고 쫓아버린 사람을 유비로 삼아서 이야기 한다면 그 사람으로서는 매우 불쾌한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정말 그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그래도 이야기하고 싶다.
이렇게 엄청난 글들이 오고 가고, 그 글들이 섬뜩할 정도로 오랜 세월, 어쩌면 내가 죽고 나도 내 글은 인터넷에 살아 있을 바로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더 많은 것을 용서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쓴 글도 촉을 잡기로 하고 뒤지기 시작하면 결국은 버텨내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 그만 절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니 이 포스트모더니티의 세상, 정보 폭발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정신에는 용서라는 이념이 가득히 들어 있어야 한다.
나는 이 판국에 어느 편에 서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지는 않다. 결론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으로 났으면 좋겠는데, 아주 선명한 한 가지 바람은 우리의 젊은 사람들이 좀 더 관대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별 수 없이 미래를 오늘의 청년 청소년에게 맡겨야 하는데, 솔직히 좀 두렵다. 어른들이 먼저 용서 가득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구체적인 방법일 것 같다. 용서의 미학이 생겨나거나 다시 살아나거나 그래야 한다.
안영혁/ 예본교회 담임목사
재창간 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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