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사랑과 배려가 빠진 정의는 살인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도스토엡스키의 책 ‘죄와 벌’에는 대학생인 라스콜리니코프는 고리대금으로 부를 쌓은 한 할머니를 죽이기 전에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불의한 방식으로 돈을 축적한 할머니를 살인하고, 그 돈으로 가난한 동생에게 쓰는 것이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하기 전에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과정을 거친다.
법과 도덕에 비추어 볼 때, 정당하고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지 검토하게 된다. ‘정의’라는 언어를 숭상하고 전면에 내세우기 좋아하는 서양인들이 그동안 저지른 수많은 행위의 뒤편에는 정의가 서있었다. 수많은 독재자들도 나름 정의 구현을 앞세워서 끔찍한 학살을 저지르곤 했다. 비록 강도는 약하지만, 우리 사회도 집단의 힘을 빌려서 불법을 정의로 치환시키곤 한다.
백만 명의 조합원을 가지면 독재자의 힘을 누리고 싶은 것 같다. 국민 세금으로 세운 울타리를 무너뜨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아마도 자신들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그 정도 불법(?)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정의에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빠지면,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살인’도 정당화하려는 유혹을 갖게 될 것이다.
오늘은 울타리를 부수고, 다음에는 기자를 폭행하고 미래에는 어떤 일을 저지를지 심히 우려스럽다. 백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집단이 사회적 약자라고 하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향기로운 정의를 기대하기 어렵다. 장미꽃은 보이지 않고, 온통 가시로 뒤덮인 줄기들로 가득한 세상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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