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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바흐와 재클린의 눈물
(성지인의 음악세상)
기사입력  2017/02/01 [15:24] 최종편집   

 

▲ 생전의 재클린 뒤 프레와 대니얼 바렌보임 


(성지인의 음악세상)

오펜바흐와 재클린의 눈물

 

재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는 비극적인 인생을 살다 간 영국 출신의 여성 첼리스트다. 1945년에 태어나 198714년간의 투병 끝에 4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니 그녀가 살아있다면 올해 나이 72세다. 16살에 런던에서 처음 데뷔한 재클린 뒤 프레는 엘가의 첼로 소나타를 완벽하게 연주해 냄으로써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여성 첼리스트, 거장급의 천재소녀, 우아한 영국장미라는 찬양을 들으며 명성을 떨쳤다.

 

그녀의 연주를 듣고 난 인도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주빈 메타는 "이 소녀는 5명의 남성이 연주하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 단 한 소절이라도 오케스트라가 그녀의 첼로 소리를 능가할 수가 없다. 나는 재클린의 연주를 처음 듣고 쓰러지는 줄 알았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의 역동적인 연주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옥스퍼드대 교수였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를 둔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4세에 첼로를 시작해 거장 파블로 카잘스와 로스트로포비치 등 당대의 대가들을 차례로 사사하며 세계무대를 흔들었다. 완벽할 정도의 기교와 풍부한 음악성을 지닌 그녀의 연주 스케일은 크고도 당당했다.

 

최고의 유명세를 떨치던 그녀는 당시 유태인 출신의 천재 피아니스트로 유명했던 대니얼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생존)1966년 처음 만난 이후, 음악적 정서와 열정의 동질성을 느껴 부모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 예루살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재클린은 "음악보다도 인간적인 행복을 추구하고 싶다. 나는 악기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며 남편인 바렌보임과의 시간을 소중히 생각했다. 바렌보임을 사랑했기에 그를 따라 유대교로 개종했을 때가 그녀의 나이 22살이었다.

그들은 장기 연주여행을 함께 다니기면서 즐거운 신혼을 보냈고, 결혼 8개월 후에는 그들이 함께 연주한 첼로 소나타도 음반으로 출시되었다. 그녀가 데뷔 이후 취입한 14종의 명반들에 담긴 불꽃연주를 우리가 오늘날까지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큰 행운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연주회 무대에 선 재클린은 첼로의 코드를 누르고 있는 손가락에 이상 증세를 느끼기 시작한다. 손끝 감각이 무뎌지고 손가락 놀림이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휘자인 남편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어렵게 연주를 마쳤지만, 남편으로부터 돌아온 소리는 당신이 요즘 너무 나태해 졌다는 힐난이었다.

 

바렌보임에게 있어서는 '자고로 훌륭한 음악가란 혹독한 반복 훈련 뒤 맺히는 기교의 열매' 라고 믿었을 정도로 매우 엄격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부인 재클린도 결코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결혼을 한지 6년이 지난 1973, 첼로의 활을 자주 떨어뜨리던 재클린 뒤 프레는 전신의 신경이 점차 죽어가는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희귀 불치병 증세로 인해 더 이상의 연주활동이 불가능해지자 결국 스스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병원에서 다발성 경화증 판정을 받던 날, 재클린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사람에게 내 정신력이 나태해진 탓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그녀가 투병중일 때 재클린은 자신의 병세로 인해 바렌보임의 음악활동에 폐가 될까 염려해 이혼을 고집했고, 그로 인해 결국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되었다. 그나마 재클린이 휠체어를 타고 혼자 활동할 수 있을 때 까지는 스스로 첼로 교본을 쓰고 세미나도 여는 등 첼로의 별들을 키워내기 위한 후배양성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경화증 말기에는 자신과 바렌보임이 함께했던 음반을 들으며 건강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누워 지내다가 14년의 투병생활 끝에 42살의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인한 급성 폐렴으로 슬픈 생을 마감했다. 당시 그녀의 자살설도 제기되었지만 재클린의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는 스스로 눈동자도 움직일 수 없었던 최악의 상태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재클린이 그토록 믿었던 바렌보임은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가 병상에서 바렌보임을 그리워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렌보임은 병문안을 온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유대계 러시아 여성 연주자와 재혼해 자신의 연주활동에만 전념했으며, 재클린의 임종만 잠시 지켰을 뿐, 애도표명이나 장례식은 물론, 무덤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음에 대해 그의 냉혈성에 대한 비난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에 대해 바렌보임은 나는 그것이 내 어머니 무덤이었다 해도 결코 가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로 사람들을 진정시키기는커녕 논란과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이스라엘의 선인장"으로 칭송받는 바렌보임은 저명한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을 뿐더러 그가 꿈꾸었던 것 이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인물이지만, 그에 비해 일부에서는 바렌보임의 음악이라면 음반 구입이나 감상조차 거부하는 안티 팬들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고전음악계에는 대표작 천국과 지옥 서곡", "호프만 이야기", "캉캉" 등으로 유명한 독일 출신의 작곡가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1819~1880)라는 인물이 있다. 오펜바흐는 특히 첼로에 정통한 작곡가로, 독일 쾰른 필하모닉 첼로주자 베르너 토머스라는 사람이 오펜바흐가 세상을 떠난 후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묻혀있던 오펜바흐의 짧은 미발표 악보 하나를 찾아냈다.

 

그리고 일부 편곡을 가해 소품으로 완성한 후, 음반으로 발표하면서 재클린의 눈물(Les larmes du Jacqueline)”이라는 앨범 타이틀을 달았다. 그런데 이 제목이 호사가들의 관심을 끌면서 세상에서 가장 깊은 존경의 마음으로 첼로음악계의 슬픈 전설인 재클린 뒤 프레에게 헌정됐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지만 이는 음반 마케팅 차원에서 앨범의 제목을 그렇게 정했을 뿐, 이 곡을 재클린에게 헌정했다는 식의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재클린의 눈물'이 재클린 뒤 프레의 슬픈 운명을 위로하는 헌정곡이라고 믿는 이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사람들은 객관적 사실 보다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믿으려 하는 기대심리가 있어서일까?

 

비록 재클린 뒤 프레는 오펜바흐의 미 발표곡 "재클린의 눈물"이 재탄생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일이지만,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은 영국에 있는 그녀의 무덤 앞에서 지금도 사랑하는 전 남편 바렌보임이 한 번이라도 찾아와 주길 기다리며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것 같은 재클린 뒤 프레의 슬픈 마음을 대신 위로하곤 한다.

 

(성지인/팝컬럼니스트)

재창간 2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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