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추종자인가 지지자인가?
대통령 선거는 끝났지만, 여전히 선거철인 것처럼 카톡에서는 아고라 공간이 구름처럼 떠다니고 있다. 하루에도 수 백편씩 올라오는 글을 보면서, 지지자보다 추종자들의 글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미국의 사례에서도 보았듯이 추종자가 많은 정치인이 유리하겠지만, 국가 전체로 보면 균형과 조화가 무너진 건강하지 못한 사회로 질주하게 한다. 이것이 심해지면 소위 파시즘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추종자는 지지자와 달리 맹목적이며 무비판적이 되기 쉽다. 그리고 이분법적 사고로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심하다. 그래서 자신이 추종하는 대상에 대해 ‘무흠(無欠)’하다는 강력한 최면에 빠진다. 그래서 비판적 지지자와 구분된다. 다수라는 집단속에 녹아드는 순간, 무법과 무질서조차 정당한 것으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언론 또한 이들을 교묘하게 이용하기 위해, 매우 복잡한 현상을 이분법적으로 정리하여 단순화시켜 준다. 추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패턴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고민하지 마라,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함께 외치자”라고 선동한다. 히틀러의 최측근으로 ‘국가대중계몽선전장관‘의 자리에 있었던 괴벨스는 추종자들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잘 알았던 선동의 대가였다. 요즈음도 카톡에는 괴벨스의 아류를 꿈꾸는 자들의 글이 판을 치고 있다.
또한 청문회를 봐도 과거 야당이 했던 비판을, 그 당시 여당의원들이 똑같이 하고 있다. 차라리 하태경의원이 정직한 것 같다. 하자가 있다고 하지만, 공정거래위원장이라는 직무 수행 능력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에 ’결정적 하자‘는 아니라는 주장이야 말로 비판적 지지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 것이다. 이제 도덕성 시비가 국민정서상 용납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면, 직무능력이 우선될 수 있도록 전환할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국회의원들이 이 경계를 넘지 못하는 한, 정치적 진보를 이룰 수 없다. 이럴 때, 추종자가 지지자로 바뀌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추종자들로 넘치는 세상은 히틀러의 파시즘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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