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자서전<헌신으로 맺은 열매>의 저자 이길자님
부모에 순종하고 가정에 헌신하며 살아온 삶!
내 고향 예산은 드넓은 평야의 고장이다. 탁 트인 들녘에서 가을에 일렁이는 황금빛 파도는 지금 봐도 장관이다. 풍요롭고 넉넉한 인심이 있는 고향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고이 간직한 한 장의 풍경화와도 같이 남아있다. 이 아름다운 고향 예산군 삽교면에서 나는 1942년 11월에 태어났다. 5남매의 장녀로서 초등학교 졸업 후 집안일을 돌보는 것이 나의 첫 번째 일이었다.
내 출생일은 호적과 같다. 당시는 호적과 출생일자가 다른 경우가 많았다. 행정 시스템이 잘 정착되지 않은 것도 한 이유고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일단 한 1년 정도 키워놓고 잘 살면 호적에 올린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버님께서 낳자마자 잘 등록해 주셔서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과는 다르게 정확하게 등록되었다. 이 부분은 지금도 감사드린다.
나는 덕산 가는 길에 있는 안치 초등학교를 나왔다. 지금은 폐교되었고 그 자리에 요양원이 생겼다. 내가 2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피난가지 않았다. 삽교서 덕산 가는 도로변에 우리 학교 교실이 있는데 창밖으로 인민군이 위장하고 행진하는 광경을 봤다. 집에 와보니 옆집이 공산당에 협력하여 마을 사람들 중에 소위 ‘반동분자’를 색출하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이(里)서기(書記)로 활동하였다. 당시 이장은 동네 유지여야 했다. 우리는 그 정도는 안되니 농사짓고 부락일의 실무를 담당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동네 유지라고 공산당이 들어오니 아버지는 몸을 피하셔야만 했다. 그래서 인민군이 있는 동안에는 노상 도망 다니고 콩밭 깨밭에서 주무셨다. 하루는 습기 많은 곳에 주무셔서 몸이 많이 아프시기도 했다. 그해 가을에는 동네 사람들이 한집에 모여 자고 어른들은 불침번을 섰다.
아버지와 사촌 오빠들은 징집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피난을 다니셨는데 여자들은 그저 집에 있었다. 참으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셋째 큰아버지는 삼남매를 낳으셨는데 한국전쟁 나던 1950년에 돌아가셨다. 이후로는 아버님께서 양쪽 집안을 한집처럼 돌봐주셨다. 당시 우리가 살던 시골집 두 집 건너에 큰집이 있었다. 나는 사촌 언니, 오빠들을 친형제처럼 따르며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족 간에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것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었다.
옆집의 셋째 큰아버지 가족과는 친형제 같이 지내며 즐거운 마음으로 집안일을 도왔던 기억이 난다. 즐거운 마음으로 집안에 헌신하니 때가 되어 독립을 하게 된다. 23세에 아버지께서 결혼을 추진하셔서 충남 당진에 사는 김태호 씨를 만나 순종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였다. 드넓은 평야지대였던 우리집과는 달리 산골마을이라 환경이 너무 낯설어 처음엔 맘고생이 심했다.
친척 할머니께서 소개시켜 준 사람은 당진에 사는 김씨 집안의 총각이었다. 나보다 4살이 위였다. 하루는 아버님께서 가봐야 할 곳이 있다면서 예산에서 당진까지 갔다. 당시만 해도 교통편이 좋지 않아서 인근에 있는 당진까지 가는데 하루가 걸렸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뭐라 하시면 거절을 하지 않았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참으로 순종적인 성격이었다.
나는 바깥채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한참 있다가 나를 부르셨다. 한, 두시쯤 되었을까? 중매하는 할머니와 어떤 남자가 들어왔다. 젊은 청년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의아해 했는데 그가 바로 신랑이 될 사람이었다. 이름은 태호라 하였다. 그렇게 남편이 와서 서로 보고 갔다. 나는 좋다 싫다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부모님 하라는 대로 순종했다. 그렇게 맞선 이후에 사주보고 한두 달 정도 있다가 결혼했다. 아마도 지금 젊은이들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라 할 것이다.
지금은 당사자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요즘도 결혼 정보 회사 같은 것을 통해 서로의 조건을 알아보고 결혼을 한다. 특히 수없이 많은 만남을 거치고 오랫동안 연애도 하지만 결혼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결혼을 하는데 까지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걸리는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결혼했다고 해서 잘 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 세대보다 이혼율이 월등하게 높기 때문이다.
옛날 방식이 나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사실 사전에 신뢰할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이미 수많은 검증이 이뤄진 뒤에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지금의 결혼 제도보다 성공률도 높았고 안정감도 더 있었다. 지금 와서 살아보니 젊을 때는 사람을 보는 눈이 없어서 단순한 감정에 이끌릴 수가 있다. 하지만 결혼하고 살아보면 사람을 보는 안목이 생겨서 한번만 봐도 그 사람의 면면을 더 잘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결혼은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에 당사자의 의사만으로는 긴 결혼생활을 평탄하게 이어가기는 힘들다. 그런 면에서 옛날 방식이 좀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고 자유롭지 않은 것이라 생각되지만 오히려 젊은이들의 시행착오를 줄여주고 빨리 사회로 나가 독립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도 있는 제도라 생각이 든다. 물론 문제도 많이 있었지만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첫 딸을 낳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서울로 올라갈 것을 권유하여 남편이 먼저 신림동에서 두부공장을 차려 정착을 했다. 이후 내가 합류하여 아이들을 키우면서 공장경영을 하며 안정화 시켰다. 이후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신림동에서 자영업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 되었다. 당시는 내가 사는 동네 윗쪽이 다 밥해주는 하숙집, 고시원이었다. 그 때 그 아주머니들이 물건을 너무 잘 팔아주어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하숙집 주인들 입장에서는 굳이 장을 보러 내려가지 않아도 집 앞에서 신선한 식재료들을 구입할 수 있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서비스를 하기 위해 물건을 사서 언덕을 오르내리는 수고가 있어야 했다. 내가 끌고 가는 리어카는 우리 일곱 식구를 끊임없이 먹여 살리는 화수분과도 같은 것이었다.
서울 올라와서 딸 넷에 아들 하나를 낳아 기르면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집안일과 장사를 병행하며 억척같이 살았다. 요샛말로 나는 워킹맘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자율적으로 양육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대학도 나오고 결혼도 하여 지금은 슬하에 손자, 손녀가 10명이나 된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부터 아이들이 장성하여 독립할 때까지 오롯이 집안을 위해 헌신하였다. 우리 다섯 형제들도 자라서 독립을 하였고 내가 시집가서 낳은 다섯 자녀들도 다 독립하였다. 이들이 아이들을 낳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훌륭하게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 모두 그간의 헌신에 대한 열매라 생각한다.
이제 자녀들이 모두 장성하여 각자 일가를 이루고 있으니 여한은 없다. 일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여 맺은 열매라 생각하니 마음이 흐뭇하다. 바람이 있다면 손자, 손녀들도 건강하게 잘 자라서 훌륭한 인재로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여생을 건강하게 살아서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평안하게 노년을 보내다 오빠들을 만나러 가고 싶다.
[이길자, 헌신으로 맺은 열매, 희망사업단, 서울, 2017]
재창간 2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