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출 칼럼)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마십시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숲을 방문하는 경우, 입구에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보게 된다. 호수나 연못에 가도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라는 안내문을 볼 수 있다. 먹이를 주면 동물들이 스스로 먹이를 찾고 생존하는, 야생 능력이 떨어져서 결국에는 ‘생존력을 잃고, 죽는다’는 전제가 담긴 경고문이다. 우리나라의 도심에서도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종종 보게 된다. ‘평화의 상징’으로 알려진 조류이다 보니, 먹이 주는 일에 제한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인지 비둘기는 사람들이 주는 넉넉한 먹이로 인해 비만이 되었다. 너무 살이 쪄서 잘 날지 못할 정도가 되자, ‘닭둘기’라는 별칭이 생겼다. 처음에는 호의(好意)로 시작했겠지만, 결국 이런 호의가 야생동물의 생존력을 떨어뜨리고, 스스로 살아갈 힘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필자가 학교에서 복지부장으로 근무할 당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아침식사를 제공해 준 적이 있다.(물론 국가에서 내려 온 복지예산이다.) 처음엔 모두가 ‘참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고, 담당교사는 메뉴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처음에는 김밥으로 시작했지만,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서 제과점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제공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침식사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숫자가 줄기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나자, 70% 정도의 학생이 오지 않아서, 음식 뒤처리가 힘들 정도였다. 결국 면담을 통해서, 한명 한명의 의견을 들어보니...이외로 이런 형태의 복지에 대해 부담스럽고, 자존감이 손상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자의식이 싹트는 중학생 시기여서 예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상당수 학생들이 앞으로도 아침식사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강하게 표현했다. 결국. 그들이 식사하는 동안, 교사들도 그 방에 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은 ‘일방적 복지’가 자존감에 큰 상처를 준 사례라고 본다. 비록 중학생들이었지만, 그들은 공짜로 주는 아침보다 자존감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이런 ‘자존감’이 상실된다면, 인간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자신의 야생능력을 잃어버린 동물들과 뭐가 다를까? 숲의 야생 환경이 건강성을 유지하려면, 동물들의 생존 능력을 지켜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야생 본능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인간의 간섭이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에는 더 이상 이런 동물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산을 누비며 먹이를 찾던 늑대가 공짜로 던져주는 달콤한 먹이 맛에 빠지면, 개가 된다. 늑대는 강인한 힘이 있지만, 땀 흘리며 애쓰기보다 적당히 꼬리를 흔들며 아부하는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무상으로 주는 먹이에 익숙해진 늑대가, 결국 먹이를 주는 인간에게 길들여지고...충실한 반려견으로 바뀐 것이다. 먹이를 통해, 개와 주인 사이에는 주종관계(主從關係)가 형성되어 버린다. 이럴 경우, 개는 그저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노예 혹은 종이 된다. 개는 자기 주인이 ‘물어!’라고 명령하면, 그 상대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가리지 않고 공격한다.
이런 현상은 인간사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 툭하면, 국민 세금을 자신의 돈인냥 던져주겠다고 공약하는 정치인들로 넘쳐난다. 그들이야 말로, 늑대의 야성을 빼앗기 위해 먹이를 던지는 나쁜 사람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유명한 경제 관련 명언이 있는데, 이것은 물리 세계의 운동법칙처럼 진리다. 누군가 재화를 생산해야,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것이다.
복지에 소요되는 그 많은 세금은 누가 낸다는 말인가? 힘들게 일해서 번 돈에, 엄청난 세금을 매긴다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차라리 적게 일하고 게으름피우면서, 복지혜택을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노예에게는 재산권이 없으니,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 그저 주인의 눈치나 보면서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는 것이 현명한 처신일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남 탓으로 돌리며, 책임 덮어씌우기 하면서 순간순간 모면하는 삶을 산다. 늘 피해의식에 젖어 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는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생각한다. 주인의식을 가져야, 스스로의 책임을 돌아볼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중학생들이 아침밥보다 자존감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면, 어른들은 자존감보다는 실리를 택하는 쪽으로 바뀐다. 주변에서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일용직 알바를 다닌다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일당이 조금 적어도 고용 기록에 잡히지 않는 일용직을 선호한다. 그래야 ‘꿩 먹고 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중으로 돈을 받으면서,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방법을 모르는 사람을 바보 취급한다. 결국 실업급여로 지급되는 돈은 ‘누군가 땀 흘려 일한 급여에서 떼어낸 세금’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건강한 도덕심과 공동체 의식이 훼손된다면, 그런 사회를 선진국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런 복지정책으로 그리스와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등은 국가 부도를 경험했다. 그러나, 배가 가라앉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 몫을 챙기려는 모습으로 아귀(餓鬼) 다툼하는 것을 보았다. 왜 요즘 정치인들은 국민의 자존감과 자아성취를 위한 동기부여 대신, 공짜에 침 흘리게 만드는가? 젊을 때, 데모하다 경찰서에 끌려갔던 경험이 있지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잘 살아보자’라는 동기부여는 보릿고개로 허덕이던 국민에게, 큰 자극을 준 것은 사실이다. 국민은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존재라고 희망을 준 메시지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도랑도 넓히고, 산에 나무도 심고, 지붕도 개량하면서, 자신들의 힘으로 삶을 바꾸는 주인의 경험을 한 것이다. 무력감에 젖어 있던 국민이 ‘할 수 있다’라는 생각만으로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정치인은 국민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비전을 제시하며, 미래의 성공을 위해 나갈 수 있도록 앞장서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나마 회복했던 자존감, 자립감, 협동정신이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누가 다시 조선의 노비로 되돌리려고 하는가? 땀 흘려 일하는 대신, 정부가 배급하는 것을 받아먹는 사회로 만들겠다는 뜻인가? 이미, 소련과 북한 그리고 중국도 폐기한 노선이다. 노비 근성의 최악은, 주인 의식의 결여에 기인한다. 즉 모든 일을 남 탓으로 돌린다는 점이다. 내 나라, 내 조상, 내 부모, 내 이웃 탓이고, 나의 잘못은 없다는 이런 사고가 건전한가? 우리나라가 헬조선이면, 왜 동남아의 대부분 근로자들이 우리나라에 오려고 발버둥 치는가? 스스로 정치인들의 노비로 전락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에 그토록 치를 떨면서, 자발적으로 누군가의 노예가 되려고 한다면 얼마나 비이성적인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15세기 한명회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전체 인구가 약 1000만 명 정도였는데, 노비의 숫자는 400만 명이었다. 다시 조선왕조의 노비 시대로 복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난해서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누군가의 노예로 사는 삶은 거절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