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출 칼럼)
독서, 특히 역사책을 읽는 기쁨
▪ 역사의 흐름이 보이면, 각성의 엔돌핀이 솟구친다.
한국사람이라면, ‘흐름’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물을 연상하게 된다. 그렇다. 역사의 흐름이 물의 흐름과 너무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은 자연의 법칙인 중력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다시 ‘중력’이라는 자연법칙이 개입한다. 가끔은 아래로 흐르다가, 큰 돌이나 장애물을 만나면 잠시 그 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지만, 반드시 다른 출구를 찾아서 다시 아래로 흐른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마치 자연법칙이 무력화된 듯이 흐르지 못하고 고이거나, 맴도는 경우를 보게 된다. 실제로 커다란 댐이 가로막혀 있다면, 거의 몇 년간 그 댐을 다 채울 때까지 물은 흐르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리 큰 댐이라 해도 결국 물은 그것을 넘어간다. 그래서 중국의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을 통해, 최고의 선은 물과 같으니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고 했다. 다투지도 않고 그냥 낮은 데로 흘러갈 뿐이라고 했다. 만약 역사가 물과 같다면, 역사의 흐름에도 우리가 모르는 하늘의 도(道)가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깨우치지 못한 중생은 작은 일에도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면서, 세상에 종말이 온 듯 두려워한다.
최근에 독서모임을 통해, 세계사와 관련된 책들을 보면서 조금씩 눈이 트이는 각성의 기쁨을 맛보고 있다. 아마 우리가 로마의 네로황제 시대에 살면서, 기독교인이었다면 분명 세상에 종말이 왔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는 그런 해석 이외에 달리 길이 없었을 것이다. 네로황제가 커다란 바위처럼 보였겠지만, 여전히 믿음의 물길은 멈추지 않고 비켜서 흘렀다. 역사의 흐름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무관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후대인으로 역사를 보니, 위대한 황제나 교황조차 시냇가의 작은 바위에 불과했다.
역사책을 읽는 것은 마치 아마존의 거대한 물줄기를 비행기에서 한 눈에 보는 것과 같다. 길고 긴 아마존강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흘러가는지 높은 곳에 바라볼 때,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기쁨을 체험해보라. 그저 강가의 모래알갱이 같은 존재가 우리라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실체를 보고,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를 깨닫는 순간 위대함에 동참하게 된다. 독서는 우리를 무한한 자유로 인도하며, 위대한 정신의 반열에 참여하게 해준다. 지혜로움은 훈련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획득되어 진다.
▪ 독서는 선택받은(?) 사람의 특권이다.
개신교인 중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처음엔 도무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비이성적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공감하게 되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되면서, 이해가 되었다. 알 속에서 자란 병아리가 성장하여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 자신의 부리로 알을 깨려고 쪼아댄다. 그러나 힘이 부족하여 껍질에 흔적만 남긴다. 그때 밖에서 그 소리를 들은 어미닭이 그 부분을 쪼아주는 것을 ‘탁(啄)’이라 한다. 병아리와 어미닭의 절묘한 협력에 의해, 알껍질이 깨어지고 병아리는 새로운 세상에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선택을 ‘탁(啄)’으로 이해한다. 그분의 선택이 무작위인 듯 하지만, 알껍질 안에서 힘겹게 쪼아대는 ‘줄(啐)’의 소리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분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하셨으며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서 애쓰는 것처럼 나를 찾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독서는 한가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라고 불평하는 이도 있다. 그렇지 않다. ‘밥’과 ‘돈’이 전부가 아니라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돈을 벌기위해 치열하게 노력한 것처럼, 그렇게 책과 씨름해야 줄탁동시가 일어난다. 그래서 독서는 여가활동이나 취미가 아니다.
요즘 중세로마와 관련된 책을 과거보다 더 깊게 읽으면서, 어쩌면 종교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이 이렇게 판박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성경은 있지만, 예수는 사라졌다라는 비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재림예수라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수백명이 넘는 시대이다. 왜 이렇게 문명이 화려하게 발전한 시대에 다시 ‘지성의 암흑’을 느끼는가? 중세 유럽에서 평민이 성경책을 읽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로 취급했다. 책을 읽을 수 없고, 도서관이 문을 닫으면 이성은 빛을 잃고 암흑이 지배하는 시대를 살게 된다. 짧은 문자와 그림 위주의 카톡, 인스타그램, 트위터, 네이버 등의 SNS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매일 매일 쏟아지는 SNS를 소화하기도 힘든데, 두꺼운 책을 읽기가 쉽지 않고 시도도 하지 않는다. 문해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거짓뉴스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조차 갖추기 힘들어 졌다. 이렇게 역사에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 역사는 ‘인공지능’이 새로운 통치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인식과 사고를 지배할 수 있다면, 그는 새로운 통치자가 되는 것이다. 과거 역사를 보면, 왕이나 황제는 종교지도자들과 협업하여 평민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요즘 흔히 쓰는 가스라이팅시켰다는 의미다. 자신들은 이생에서 최고의 풍요와 쾌락을 누리면서, 가난한 평민들에게는 천국의 꿈에 취해서 살도록 설교했다. 온갖 불법과 불의한 일을 당해도, 감히 저항할 수 없도록 철저히 의식화시켰던 것이다. 마틴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찍어서 배포하고 평민들이 읽게 되면서, 이런 암흑의 시대가 무너지게 되었다. 그러나 21세기는 도서관과 책이 넘치지만, 자발적으로 ‘인공지능’의 지식과 판단에 자신을 맡기기 시작했다. 마치 누구나 성경을 소지하고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고 목사에게 의지하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가와 정치인들이 ‘인공지능’의 잠재력을 발견한 이상, 철저하게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활용할 것이다. 학교에서는 교과서 대신 인공지능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론을 주도하던 각종 신문과 방송의 자리를 ‘인공지능’이 소리없이 스며들고 있다. 이번 주에 내가 무슨 물건이 필요한지, 어떤 뉴스를 보고 싶어 하는지 알아서 보여준다. 맞춤형으로 필요를 충족시켜 주니, 굳이 고민하거나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나의 루틴을 모두 스캔하고 학습하여,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여 만족감을 제공한다.
특히 인공지능 기술을 독점한 기업은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해 줄 정치인과 협업할 것이다. 어떻게 장담하느냐? 그것은 역사가 말해준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전문가들이 ‘인공지능’에 의해 무력화되는 시기가 올 것이다. 의사, 약사, 변호사, 세무사, 변리사, 기자, 은행원 등 줄줄이 일자리가 축소될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역사는 그들이 저항하기보다, 협력하거나 수용하는 쪽에 설 것이라 예측한다.
한 두 사람의 힘으로 어렵지만, 독서하는 집단지성이 살아있으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있다. 즉 막을 수는 없지만, 인류에게 유익한 쪽으로 흐름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