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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계획도시 수원화성과 용주사
우리 나라 네 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기사입력  2003/12/09 [21:56] 최종편집   
수원성은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로서 국내외 성곽의 장점을 흡수하여 설계, 제작되었고 현재 사적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의 유해를 양주 배봉산으로부터 수원 남쪽 화산으로 천장하고 이 성을 축성하였다.



팔달, 창룡, 장안, 화서의 4대문과 루, 돈대, 치 등의 각종 성곽시설이 원형에 가깝게 정비되어 있어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과학적으로 세워진 이름난 성이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네 번째로 유네스코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97년도에 지정되어 있다.



용주사는 수원대학에서 융건릉 가는 길 평지에 자리잡은 사찰인데 사도세자의 원찰로서 정조가 능행길에 임시로 머물렀던 행궁의 역할도 하였다.



到此門來 莫存知解. 용주사 정문을 들어서 표를 구입하면 바로 이 글귀가 새겨진 두개의 석주를 볼 수 있다. '이문에 이르러서는 마음을 허공과 같이 비우라'는 뜻이다. 이 길을 따라 여러 뜻이 담긴 석주들이 길게 늘어섰는데 좌우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시원하게 뻗은 널따란 숲과 같은 터가 있다.



처음 이 자리엔 854년 신라 문성왕때 염거화상이 창건한 갈양사가 있었다. 호란으로 소실된 채 방치되다 정조가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크게 다시 짓고 원찰로 삼았다.



당대의 고승인 보경스님이 융릉의 이 장지를 찾아다니는 정조에게 '부모은중경'을 설하고 능지를 추천했다. 정조는 '부모은중경' 설법에 감동을 받아 보경스님으로 하여금 4년만에 145칸의 불사를 완성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꿔 절 이름을 용주사라 했다.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에 의해 죽음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해 지극한 효성을 보임으로써 정조는 노론을 견제하고 자신의 기반세력으로 채제공, 정약용 등 실학파를 등용하였던 것이다. 정조의 실학파에 대한 지지는 대웅전 후불탱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북학에 심취했던 정조가 단원 김홍도로 하여금 서양화풍으로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현판은 정조의 친필이라 한다. 대웅전 앞에 힘없어 보이는 작고 가는 나무가 있는데, 회양목이다. 수령 300년 된 나무로 지금은 길가에 울타리 정도로밖엔 안 쓰이나 예전에 도장나무라 하여 귀하게 여기던 나무다. 이 나무 역시 정조가 기념식수하였던 나무라 한다.



이처럼 용주사는 정조의 보살핌이 극진했던 사찰로 건축 역시 사찰과 궁궐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재미있는 사찰이다. 용주사와 함께 융건릉을 둘러보고 수원시내의 수원성(화성)을 둘러보면 당시 정조의 처지와 군웅으로서의 야망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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