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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화천에서 출발한 ‘국망봉’ 비박기
기사입력  2015/05/21 [18:05] 최종편집   

 ■이변의 산행기행
강원도 화천에서 출발한 ‘국망봉’ 비박기

▲ 국망봉 능선

 

가여린 연두색 새싹이 돋는가 싶더니 산중은 어느새 초록으로 덮였다. 이 계절엔 신록이 꽃을 압도한다. 숲 속 4월의 철쭉은 행인의 눈을 사로잡았으나, 5월인 지금은 오히려 초록 잎을 빛내는 조연이다. 잎과 꽃 사이로 세월이 바람처럼 지나가고 있다.


국망봉은 한북정맥에 자리하고 있다. 한북정맥은 추가령에서 백두대간으로부터 분기하여 한강 이북으로 타고 흘러 임진강 유역까지 유장하게 뻗쳐있다. 행정구역으로는 포천과 가평, 화천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산줄기는 끊기지 않고 화악산,, 명지산, 국망봉, 백운산, 연인산 등지로 이어진다. 한북정맥 산행의 백미는 능선길 사방으로 펼쳐진 장쾌한 전망이다. 후련하고 통쾌하다. 첩첩 산중, 인간사에 부대껴 산을 찾았건만, 20시간 만에 마주친 등산객이 반갑다.


산행을 시작한 사창리에서 5km 지점에 신로봉이 있다. 갈 길이 바쁜 행인은 이곳을 지나치기 십상이나 조금만 발길을 돌려 올라보면 절묘한 풍광을 맛 볼 수 있다. 고색창연한 바위들이 푸른 육산을 마주하고 있다. 탄생의 기원이 다른 것인가. 저 멀리 국망봉은 운무에 휩싸여 모습을 감추고 있다.


비박은 자유를 선사한다. 산행길 어디서든 짐을 풀고 텐트를 치면 그곳이 집이다. 인간이 한 곳에 머물며 정박을 하기 시작한 때는 불과 일만년도 채 되지 않았다. 유랑은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이다. 문명은 정박과 함께 왔다. 그렇기에, 산 중 야영은 우리의 본능을 깨우고, 잊혀진 머나 먼 조상의 그림자와 일시에 직면하게 한다. 일행은 불현듯 수 많은 세대를 뛰어 넘어 운명을 같이 하던 부족의 일원이 된다. 신로봉 아래 아늑한 숲 속에서 부족원과 밥을 해먹었고, 술을 했고, 땅을 파서 변을 보았다.


국망봉(國望峰)은 화악산, 명지산에 이어서 경기제3봉이다. 1168m.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이 첩첩 산중 높은 봉우리에 그 무슨 나라를 기대한다는 명칭을 갖고 있는가. 역사의 통곡을 품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그 사연은 궁예의 것이다. 궁예는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국가의 기강을 세워 나가는 과정에서 폭정이 심해졌고, 이를 간언하는 부인 강씨를 귀양보냈다. 후일 왕건에게 패한 후 부인을 찾았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궁예는 국망봉에 올라 도성 철원 쪽을 바라보며 깊은 회한에 잠겼다. 부인이 곁에 있다면 나라를 잃은 통한을 잊을 수 있으련만...함께 간 친구는 궁예의 후손이다. 그 자손들은 숨죽여 지내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서야 성씨를 받았다고 한다. 운무가 국망봉을 감싸고 있어, 궁예의 회한을 더듬기 어려웠다.

▲ 국망봉 야생화 노랑제비꽃



궁예의 회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국망봉엔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있다. 내 일생의 유한함이 엄습할 무렵부터 이 행성을 수 놓고 있는 아름다운 생명들에 연민이 생겼다. 같은 처지 아닌가. 작은 꽃들에 눈길이 가고 유심히 보게 된다. 오늘은 노랑제비꽃에 마음이 간다. 노란 꽃잎에 진한 자주색 줄무늬가 그어져 있다. 그 줄무늬는 멀리서 보면 꽃술로 보인다.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함이다. 나는 이렇게 꽃술이 많다오...꽃술을 키워내는 건 엄청난 비용이 드는 일이다. 이 자그마한 꽃은 차마 꽃술을 많이 생산하지 못하고, 혹여 벌과 나비가 그냥 지나칠까 두려워 줄무늬를 그은 것이다. 노랑제비꽃의 위장전술이 애교스럽기도 하고 가엾기도 하다. 자신의 생존만이 목적이라면 꽃을 피울 필요가 없을 터, 번식은 생존만큼이나 생명체의 본질이다. 이 작은 꽃의 줄무늬에 담긴 애환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인간에게서 재연된다.


5월에 국망봉에 가면, 장쾌한 능선길, 찬연한 신록, 궁예의 회한, 노랑제비꽃의 애교에 잠겨 이 아름다운 행성에 살고 있음이 ㅡ 얼마나 큰 행운인지 깨닫게 된다.

 이치선/ 서울대 물리학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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