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우리는 왜 정의와 공정에 집착하는가
유명한 플라톤의 ‘국가’에는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 사이에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등장한다. 당시 유명한 소피스트였고, 현실주의적 입장에 충실했던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단언했다. 2400년 전의 아테네와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국민에게 입법권을 위임받은 국회의원들은 과연 ‘약자’의 입장을 위한 법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자신과 같은 강자들의 이익을 위한 법을 만들 것인가? ‘당연히 강자는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법을 제정할 것이며, 이것이 그 시대의 정의가 된다.’고 트라시마코스는 보았다.
몇 년 전만 해도 ‘불륜’이라고 비판했던 사안에 대해, 이제는 ‘불륜’이 아니라 ‘로멘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즉 자신들의 편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의를 왜곡시킴으로써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비록 내가 괴롭고 손해 본다고 해도 ‘정의의 본래 가치’를 준수하려는 온전한 통치자가 다스릴 때 ‘아름다운 나라’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기회는 평등하며,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롭다’는 말에 많은 국민들이 환호했다. 바로 그런 나라야 말로 모두가 꿈꾸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입니다. 뭐하라 개, 돼지들에게 신경쓰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것입니다.’라는 말은 영화 ‘내부자’에 나오는 대사이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권력자들의 달콤한 공약들이 얼마나 ‘위선과 거짓’으로 포장되어 있는지를 알게되었다. 우리는 왕이 통치하는 절대 권력의 시대에도 ‘왕의 언행에 잘못이 있을 때 바로잡기 위한 언론’이 존재했던 나라다.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에서 청년 대학 진학률이 2위의 국가이다. 이렇게 고등교육으로 무장된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일 수 있는 완벽한 권력은 없다. 국민이 위임해준 권력을 사익이나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해석하고 남용하는 태도는 국민을 개, 돼지 취급하는 것과 같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불공정하고 부정의 한 것은 참지 못하는 DNA가 우리 국민의 핏속에 흐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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