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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국민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권영출 칼럼)
기사입력  2020/10/15 [15:50] 최종편집   

 

 

▲권영출 본지 회장

(권영출 칼럼)

정치가 국민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이성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면서 놀랄 때가 많다. 그간 우리 국민은 감성이 풍부해서 타인과의 공감능력도 높고, 배려심 또한 선진국 수준과 크게 멀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극단적인 흑백논리와 이분법적 사고가 전염병처럼 국가 전체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이 전염병의 발원지가 정치라는 점에는 공감하는 것 같다. 정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서 절대 다수에게 평화와 행복 그리고 경제적 부()를 보장해 준다는 믿음을 가졌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승자독식의 선거 제도하에서 페어플레이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목표였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기만 하면, 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불법도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더욱 심해진다.

 

따라서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묘책이 있다면 물불을 가릴 여유가 없다. 재판 중에 있지만 킹크랩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여론을 조작했던 드루킹 일당의 등장이 가능했던 것도 그런 환경이 만들어냈던 것이다. 모르면 몰라도, 대박의 기미가 보이는 이런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정치인은 드물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의 이면에는 중요한 일이라 해도 결코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만든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심리학자들의 많은 연구 결과가 사람들은 결코 깊이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이 이런 인간의 심리를 적극 이용하면서 불행은 시작되었다.

 

상호 합의된 동조 현상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하기 직전의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예를 들면 자선단체가 모금 티켓을 판매할 때, 상대방에게 커피나 음료수를 먼저 갖다 주고 난 후에 권하면, 그냥 권하는 경우보다 2배 정도 티켓이 많이 팔린다고 한다.

 

이 경우는 상대의 친절에 대한 심적인 약속이행이라는 부담이 작용하게 된다고 한다. 정치인들이 선거가 임박해서 베푸는 유형무형의 친절 속에는 이런 전략도 숨어 있는 것이다. 또한 심리학자 스텐리 밀그램은 권위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복종이라면, 명령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주변 동료들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 순응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실험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집단에 동조하려는 순응심리가 얼마가 강한지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사슴을 앞에 놓고, 첫 번째 사람이 말이라 하면 놀라서 그를 바라보지만 두 번째 사람과 세 번째 사람, 이렇게 네 번째 사람까지 사슴을 말이라고 하면 다섯 번째 사람은 그것은 말이다.’라고 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슴을 말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해도 공개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단에 대한 동조의 정도가 클수록 무조건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소수라고 하지만 집단으로부터의 소외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발적인 순응자의 길을 선택한다고 한다. 이러한 동조 현상은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심화된다는 특징이 있는데.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모임들이 이런 모습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지지하는 정도가 심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그 특징도 드러나게 된다. 정치가 순수한 국민들을 피곤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례이다.

 

비겁한 익명의 방관자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초고속인터넷망이 전국적으로 설치된 나라, 그래서 4차 산업혁명의 선두 주자가 될 줄 알았는데, 도리어 비생산적이고 비겁하고 부정적인 SNS 활용 사례의 실험실이 된 듯하다. 엄청난 투자금으로 만든 5G가 국민들 사이를 찢어놓고 모함하고 저주하는 통로로 사용되는 실정이다.

 

혼자 있거나, 이름이 드러날 경우에는 결코 하지 못한 행동을 집단 속에 있고 익명이 보장되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판단과 행동을 하게 된다.’ 혼자인 경우 그리고 이름이 드러날 경우에는 훨씬 이성적인 행동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집단 속에 있다면, 그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21세기에 새삼스럽게 양심의 소리를 회복하자는 지식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자신의 존엄성에 대해 자각할 뿐 아니라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지성과 양심을 회복하지 않는 한, 사이버 공간은 온갖 질병과 음모가 배양되는 인큐베이터가 될 것이다. 한때, 가수 겸 배우 설리가 악성 댓글로 인해 사망한 것이 알려진 직후, ‘연예 뉴스 댓글 폐지를 지지한다는 응답이 80.8%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라는 멋진 논리를 들먹이며 실명제를 거절하는데, 우리 역사상 지금처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시절이 있었던가? 그리고 다양한 견해의 표현을 통한 여론 형성의 건전한 장()이 아니다. 댓글을 살펴보면 거의 쓰레기라고 부를 정도의 저속한 글들로 도배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고, 논리적 토론이나 날카로운 논쟁의 공간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도둑들이 전기를 절약해야 되니, 밤늦은 시간에는 모든 골목의 가로등을 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설득의 심리학자 로버트 시알디니는 군중 속에 파묻혀 사회적 책임감을 회피하려는 시도를 사전에 차단시킬 때, 더 이상 방관자가 아닌 적극적인 동참자 입장으로 바뀌게 된다.‘고 했다.

 

오늘은 익명으로 남을 공격했지만, 어느 날 익명의 투명인간이 나를 공격할 수 있다. 이런 공격이 가장 심한 장소도 정치적 견해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집단끼리는 더 이상 같은 국민이 아니다.

 

오히려 적()보다 더 격렬한 저주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댓글을 읽고 감동되어 자신의 견해를 바꾸었다는 사례를 접해 본적이 있는가? 그곳은 남의 소리를 듣고 보려는 귀와 눈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내 말을 쏟아붓는 입만 존재하는 곳이다. 그래서 초고속통신망과 정치는 더 빠르고 신속하게 국민들의 피곤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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