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좋아요’가 곧 ‘정의, 진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좋아요’와 ‘정의, 진실’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좋으면서 정의롭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정의, 진실’은 다분히 가치에 관한 문제이지만, ‘좋아요’는 감정에 기반하고 있다.
한때, ‘미녀는 도둑질을 했어도 용서할 수 있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미녀를 싫어할 남성들은 거의 없으니, ‘미녀가 도둑질을 했다는 기사’에 ‘용서해 주자’는 댓글이 달리고 많은 남성들이 ‘좋아요’라고 클릭했다고 해도 그들이 도둑질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그냥 가볍게 재미삼아 ‘좋아요’라고 클릭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여성이 법정에서 ‘좋아요’의 횟수를 인용하며 무죄를 주장한다면, ‘좋아요’라고 클릭했던 많은 남성들의 태도가 어떻게 바뀔까? 익명이 보장된다면, 그들 중 상당수가 무죄에 동의할 것이라고 한다. 살인이나 강도가 아닌 ‘절도죄’인 경우 더욱 그런 성향을 보인다고 한다.
만약 ‘미녀’ 대신 평소 내가 좋아하고 존경했던 ‘인물’로 대체시킬 경우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최근 우리 사회는 SNS와 같은 매체의 확산으로 이런 추세가 광범위하게 표출되고 있다. 특히 정보의 홍수가 개인이 필터링할 수 있는 한계를 심하게 넘어버렸다. 그래서 일일이 검증하고 확인할 방법이 없다. 매시간 오는 카톡과 전달 정보가 수백건, 수천건이 쌓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보의 편식’이 일어나게 된다. 구글의 빅데이터와 딥러닝은 소비자의 정보형태를 분석하여 선호하는 정보만 골라서 더 많이 보내 준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 ‘좋아요’로 출발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진실, 정의’로 굳어지게 된다.
그러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과는 강한 연대감이 깊어지는 반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 대한 적대감도 싹트게 된다. 이 경지를 넘어서면, 자신도 모르게 종교적인 광신자 수준이 되어버린다. 1%의 사실만 있어도 99%의 거짓에 눈감고, 100%의 진실로 둔갑시키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심하면 오랫동안 사귀던 친구와도 단절하면서, 평소 일면식도 없었던 집단과의 일체감을 굳건히 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오류로 판정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기에, 비이성적인 말과 행동도 하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핸드폰을 끄고, 책과 친해지는 여유를 갖도록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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