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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과 아전인수
(안영혁의 힐링칼럼)
기사입력  2020/02/25 [12:37] 최종편집   

 

▲ 안영혁 목사


(안영혁의 힐링칼럼)

해석과 아전인수

 

칸트가 그 시대 석학들도 알아듣기 어려운 순수이성비판을 쓰고는 이제 형이상학도 자연과학이 진리를 얻는 방식으로 진리를 얻어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인문학자들은 철퇴를 맞은 느낌이었을 거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철학을 하는 것이 이미 대 유행상태였지만, 도저히 마땅치가 않았다. 자연과학적 물질의 냉혹함이 인간사를 난도질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철학이 해석학이고 또 현상학이다. 해석학은 과학적 사실에 대해서도 인간은 결국 거기에 인간성을 결부시킬 수밖에 없고, 그 인간성이 결부된 이해만이 의미 있는 이해라고 본다. 현상학을 해석학으로 환원시킬 수 없지만, 현상학적 해석학이란 개념이 있다. 현상학이란 현상에서 그 현상과 함께 본질도 본다는 인식적 입장이다. 그러고 보면 현상이란 그 자체가 과학적 사실이기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 현실이다. 그래서 그 개념 자체가 해석학에 가깝다. 현상학적 해석학이란 이런 현상학적 입장을 충분히 반영시킨 해석학이라는 뜻도 되겠고, 현상학 자체가 해석학이란 뜻도 될 것이다.

 

진리를 얻는다는 입장에서 인간이 그 진리에 결부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해석학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과학조차도 인간과 결부된 진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거나, 과학자들이 그것을 반대한다면 적어도 인간이 결부된 사실에서는 과학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인간성을 배제하지 말라는 것이 해석학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조차 자연과학에 항복하는 상황을 연출할 때, 그래도 해석학이 가능하다는 말은 수많은 인문학자에게 얼마나 가뭄에 단비였을까? 그러나 이 해석학의 존재로 인하여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이 인간 현실이다. 해석이란 너도나도 자신의 입장을 담아서 말하면 어쨌든 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해석이 가는 길을 가늠하기는 정말 어렵다.

 

2019년 하반기를 보내면서 그런 해석의 위험을 절감하였다. 우선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 해석이 있었다. 검찰 총수가 한 가족을 수사하면서 시시한 죄목 몇 가지로 70회를 넘나드는 압색을 했다. 그에 대한 자평은 법과 원칙을 따라서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70회를 넘나드는 압색에 대한 그의 해석이었다. 그는 이런 터무니 없는 해석을 하고도, 자신의 자리를 사회가 인정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그의 임기 동안에는 그의 해석을 가지고 어떤 결정적인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터무니없는 해석을 한 것이 그의 선택이라면, 그를 검찰의 총수로 세운 것은 우리 사회의 선택이었다. 이 선택들도 알고 보면 하나의 해석들이었다. 사회도 해석을 잘못했으니 그 쓴맛을 견딜 수밖에 없다. 이제 다시 그를 다른 방법으로 압박하여 총수의 자리에서 밀어낸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또 한 번의 실수가 될 것이다. 물론 정당하게 그런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어떤 사실이 형성된다면, 그런 해석을 내리고 그를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가장 분명한 해석은 그의 해석이 틀렸더라도 그의 임기는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미래를 지향한다면 말이다.

 

그래도 아쉬움은 많다. 그가 그런 터무니 없는 해석을 하지만 않았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더 발전할 수 있었을 텐데, 말하자면 좋은 해석의 공조를 만들지 못하고, 나쁜 해석들의 충돌만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사실 지금도 민주주의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알고 보면 할 수 있는 해석과 할 수 없는 해석을 개인적이건 사회적이건 바로 알고, 그 바른 만큼만 자신의 인간적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2019년 하반기 우리나라 민주주의 공부는 C+를 넘을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실패한 공부는 앞으로의 공부에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해석을 이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다들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한편 소위 아전인수격 해석을 막무가내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것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발전에서 큰 걸림돌이다. 그러니까 민주주의 발전에서 해석학의 문제와 제도적인 문제가 같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세상에, 누가 있어서 이런 엄청난 산을 넘어서 가지!

 

그래서 하여간 필자는 조국이란 카드가 참 아깝다. 그는 참 특별한 카드였던 것 같은데, 흙수저들이 이 금수저를 한 번 용서해주면 그가 흙수저를 위해서 뭔가를 해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꼰데가 되어가는 필자의 잘못된 해석이려니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쉽다. 그래도 민주주의 공부는 온 나라 모든 사람이 하기는 해야 한다.

 

안영혁(예본교회목사, 총신대학교교수, 관악사회복지이사)

재창간 3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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