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출 칼럼)
떠오르는 베트남과 호치민
□잊혀 지지 않는 신선한 충격
10여 년 전 학교 선생님들 모임에서 베트남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베트남’ 하면 ‘베트콩과 미국의 반전 시위, 월남 전쟁 영화’ 그리고 월남 전쟁에 참여했던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전부였다. 정확히 아는 것은 없는데 그래도 뭔가 아는 듯한 나라였다. 그래서 학생들 앞에서 ‘베트남’이란 나라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을 때면 뭔가 열심히 떠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우연히 베트남 여행에서 호치민의 묘소를 갔다가, 나의 무지함과 선입견이 얼마나 부끄러웠던지....동료들과 한참 동안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호치민의 집무실을 둘러보는 동안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고, 뭐라 할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받은 충격은 ‘마치 바지의 지퍼가 활짝 열린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명동을 활보한 것과 같은 수치심’이었다.
그 후 호치민이 애독했다는 목민심서를 보게 되었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고 읽으면서 나의 무지를 조금이나마 위로했다. 돌아보면, 우린 너무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심지어 그 무지함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고, 때로는 광장에 나가서 목청껏 외치기도 했다. 한때,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다고, 유모차까지 끌고 광장에 나갔던 광경이 떠오른다. 그중에 몇몇 분들은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하고 검증한 지식에 근거하여 행동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내가 베트남에 대해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도의 지식수준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우리가 ‘너무 쉽게 흥분하고 또 쉽게 잊어버리는 성향이 있다.’는 외부인의 평가를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지혜롭고 현명한 이웃을 만나면 그나마 다행인데, 사기꾼을 만나거나 모사꾼의 손에 걸리면 ‘바지의 지퍼를 내린 채 명동을 걸어 다니며 소리 지르는 격’이 될 수 있다.
이번에 유력 언론사인 KBS, JTBC, TBC, CBS와 여러 명의 국회의원들까지 농락당했던 것으로 드러나는 ‘윤지오씨 사례’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왜 그들은 검증과 분석이라는 기본적 과정을 생략하고 그토록 그녀에게 집착했을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은 뻔한 것이다. 그 방송사와 몇몇 국회의원들은 이미 스스로 답을 정해 놓고, 그것을 보충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기에 이해관계가 딱 들어맞은 탓이다. 이것은 윤지오씨가 지인과 나눈 카톡의 내용을 보면, 윤지오씨는 이런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같다.
□ 위대한 지도자가 너무도 중요한 이유
프랑스를 물리치고,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과 맞서서 결국 승리를 쟁취한 위대한 혁명가의 유품치고는 너무 너무 초라했다. 지팡이 하나와 낡은 옷 몇 벌,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비롯한 몇 권의 책이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이었다. 책상이나 의자는 재활용센터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낡았다. 외부로 알려진 불멸의 전사 그리고 베트남 군대의 수장이자 국가의 최고 통치자였다는 그 수식어를 부끄럽게 하는 유품이었다.
결코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전쟁에서 국민들은 왜 호치민을 믿고 따랐을까? 깊고 강하게 국민들을 움직일 수 있는 진정한 힘은 ‘언행일치’라는 아주 단순한 덕목에 담겨 있었다. 그가 유명을 달리했지만, 9천만 베트남인들의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인물이다. 한때, 90%의 가난한 서민을 대변하겠다는 듯이 마이크를 잡고서, 세치 혀로 환호를 받았던 그들이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보라.
한 두 시간 특강으로 수 천 만원의 강사료를 받아서, 그렇게 비난하고 혐오하던 바로 10%의 집단으로 이주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각 방송국마다 자리를 잡고 연간 수 억 원의 출연료를 챙기면서 부자들의 무리에 합류하고 있다. 어떻게 돈을 벌고 쓰는지 일일이 간섭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지도자와 리더로 자처하며 대중을 이끌었던 이들은 범인들과 달라야 한다. 이것이 일반 국민들이 그들에게 기대하고 환호의 박수를 보냈던 이유이다.
왜 월남인들은 호치민을 ‘호 아저씨’라고 부르며 깊은 존경을 마음을 품었는지, 그리고 미국과 싸우면서 결코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긴 호흡으로 국가를 위한 진정한 선택이 무엇인지 늘 고민했던 분이다. 그래서 그는 죽어가면서 ‘정치 보복을 하지 말고, 자신이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준 소수민족을 배려하라’는 유언은 지금도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
적을 용서하고 소수민족을 배려하는 관용과 통합의 리더십은 오늘의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는 베트남의 힘의 원천이 됐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과거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던 미국과 93년 외교관계를 회복하고, 98년 3월 잭슨-바니 수정안에 의해 미국으로부터 최혜국 대우자격(Jackson-Vanik waiver)을 부여받고, 2000년 10월 빌 클린턴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이 있었다. 그 후 매년 8% 정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아시아의 잠룡으로 부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