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자서전 : 2017년도 제작 <어사>의 저자 서홍덕님(3부)
중앙정보부 상응하는 권력기관 ‘감사원’에 입사
격동의 시절, 중앙정보부에서 감사원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다시 시험을 봐야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는 와중에 1980년 8월 2일 첫아들이가 태어났다. 첫아들을 품에 안는 순간 하늘을 날듯이 기뻤고 아내가 너무도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이러한 아내와 아들을 생각해서 반드시 감사원 입사시험에 합격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성을 다해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광주 민주화 항쟁을 거치면서 우리나라 경제여건은 대내외적으로 더욱 어려워져 갔고 실업자도 점점 더 늘어만 갔다. 이에 감사원 감사직렬 시험에도 사람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엄청난 경쟁률을 보였으나 나는 무난히 합격하였고 1981년 11월 5일에 감사원으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나는 감사원 제2국 제5과에 발령을 받았는데 우리 과는 국방부, 육·해·공군, 병무청, 외무부, 법무부, 국토통일원, 국가안전기획부(중앙정보부의 후신) 등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첫 출근 다음날부터 본관 6층에서 동기 30여명과 유신 사무관 출신의 부감사관 5명과 함께 한 달간의 신입직원 교육을 받았다.
1981년 12월 5일 신입교육 종료 시 신규 채용자 직무교육 과정에서 내가 ‘우등’을 하여 당시 이한기 감사원장의 상장을 받았다. 그리고 사무총장 주재로 전 교육생이 간부식당에서 오찬을 하는데 우등상을 받은 나는 사무총장과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사무총장께서 “감사원에 대한 소감이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였다. 나는 청와대 뒤 북한산 중턱위에 있는 큰 바위를 가리키며 “저는 저 바위처럼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감사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열심히 하고 초심을 잃지 않기 바라네.”라고 화답하시며 잊지 못할 식사를 마치게 되었다.
초년병으로서의 감사원 생활은 제2국 제5과에서 시작되었다. 연말에 전 직원이 대한민국 전 지역을 나눠서 “연말 공직기강점검”을 나간다고 하였다. 나의 동기들은 첫 감사를 간다고 우쭐대며 기분이 들떠 있었다. 그러나 우리과의 박양호 과장님은 신입생 교육도 우등으로 마친 나를 감사에서 제외시켰다.
내 동기들은 매월 감사를 다니는데 과장님은 나를 6개월간 출장 한번 보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쭐대는 동기들이 부러웠고 그런 과장이 내심 섭섭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과장님이 이런 말을 했다. “너는 꼼꼼하게 서무 일을 잘 봐줘서 참 고마워하고 있다. 그리고 네가 일을 잘하고 있으니 감사를 하고 있는 네 선배들이 더욱 열심히 일을 하지 않겠나?” 하시는 것이다. 생각 외로 과장님께서는 참 인자하셨고 사려 깊은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초년병으로서 그분이 존경스러웠다. 원내에서 그분 별명이 “영국신사”였는데 그 별명에 걸맞게 늘 직원들에게 따뜻한 말로 격려해 주셨고 업무에 있어서는 정확하고 예리하게 임하셨던 분이시다. 감사 결과를 처리하실 때에는 문안을 늘 날카롭게 다듬어서 적출자들에게 수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과장님은 늘 “감사원은 목에 힘이나 주는 기관이 아니고 자신을 수양하는 곳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최고의 감사인,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라는 감사인이 되기 위해서 초년병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선배들이 지적한 처리안을 서브노트 할 것이 아니라 다 외워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냥 외우는 것이 아니라 확인서 등 증거서류를 검토하고 선배가 무엇을 검토하지 않았는지, 또 잘못 검토한 것은 없는지를 살펴보고 나라면 어떻게 감사할 것인지도 생각하며 외우기로 하였다. 그 뒤로 나는 선배들의 지적 사례들을 열심히 외우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감사를 잘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영국신사인 과장님은 나에게 “감사원은 자신을 수양하는 곳.”이란 명언과 함께 1987년 10월 26일 심의실장으로 계시면서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다(德不孤).”는 소중한 말씀을 남겨 주시는 등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으며 그 후 감사원 사무차장도 역임하시고 퇴직 후에는 한국통신(KT의 전신) 감사로 가셨다.
감사초년병에서 표창 받기까지
감사원 입사 6개월이 지난 후부터 나도 감사현장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과에서 제일 막내이며 서무로서 감사현장에 투입돼도 맨 말석에 앉아 선배들 심부름하기에 바빴고 감사경험이 없어 제대로 지적도 하지 못하였다.
나는 뇌물 · 공금횡령 · 문서위변조 등 한마디의 변명도 불가능한 법령 위반사항을 주로 지적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나중에 직무감찰의 대가가 되는 출발점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문답서를 작성하면서 그 어렵다는 징계를 그렇게도 많이 할 수 있었고, 1년이 지나자 나는 감사를 잘하는 사람으로 통하게 되었고, 2년이 지난 1983년 11월 7일 감사실적우수자로 정희택 감사원장의 표창을 받게 되었다. 3년차인 1984년 12월 31일, 4년차인 1985년 3월 20일에도 감사실적우수자로 각각 황영시 감사원장의 표창을 수여받았다.
과연 감사에 왕도란 어떤 길이며 어떻게 하면 득도를 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감사에 매진할 때에 앞으로 나는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최고의 감사인이 되고 싶었고 그 다음으로 꼭 한번 청백리상을 받고 싶었다. 그러던 중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님께서 병환으로 소천하시는 일을 겪으며 나는 앞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새로운 각오를 했다.
첫째, 2차는 없다. 감사관의 제일덕목은 청렴이고 청렴만이 살 길이다. 내 자신이 감사를 하면서 1차로 저녁식사를 하고 2차로 고급술집에 가서 뇌물을 받고 술집 여성과 추악한 짓을 한 파렴치한 공무원들을 많이 보았고 언론에서도 심심찮게 보도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1차로 저녁식사 정도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2차만 가면 문제가 생긴다. 감사원에서 정년퇴임하는 그날까지 절대로 2차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 원칙을 지키며 살았다.
둘째, 새벽 5시 전에 일어나자. 누구나 자기 직업에서 프로가 되어야 한다. 프로가 되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날의 할 일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잘 할 수 있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 한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세상은 고요하고 머리는 한없이 맑다. 이 시간에 나는 오늘 어떤 부정한 공무원을 잡아서 어떻게 확인서를 받고 송곳 같은 질문을 하여 상대방이 절대로 반박하지 못하는 문답서를 작성할지 곰곰이 생각하기로 하였다. 5시 전에 일어나리라는 작은 결심 하나가 먼 훗날 전체 감사인의 영예인 ‘마패상’을 수상하게 되는 결실을 맺게 된다. 그리고 서울신문에서는 ‘비리 공무원에게는 저승사자’라고 극찬하는 나와 관련된 칼럼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또한 ‘감사원의 살아있는 전설’로 회자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출처. 어사, 서홍덕 저, 희망사업단, 서울 2018>
재창간 3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