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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파병 만4년 만에 현지제대 ... 미국계 회사 취업
2017년도 제작 <고독한 오지의 한국인>의 저자 박상호 님(6부)
기사입력  2018/02/22 [17:36] 최종편집   

 

▲ 베트남 참전용사들과 기념사진

어르신자서전: 2017년도 제작 <고독한 오지의 한국인>의 저자 박상호 님(6)

월남파병 만4년 만에 현지제대 ... 미국계 회사 취업

 

당시 월남전은 게릴라전이 주로 이뤄지고 있어서 수시로 전사자가 발생했다. 대량 살상이 이뤄지지는 않아도 거의 매일 전사자가 나왔고 부대 편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병력을 바로바로 충원해야 했다. 하지만 파병의 주체인 미군은 거리가 멀어 바로 충원하기가 어려워 보충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민간인도 갑자기 충원이나 선발을 하려면 신원조회로 인해 한, 두 달 걸리니 충원하는 것이 어려웠다.

반면, 인근의 필리핀은 아예 클라크 공항에서 대기인력을 배치시켜났다가 결원생기면 바로 보냈다. 그러다 보니 한국군보다 필리핀 군 인력의 비중이 높아지고 이것은 곧 국가 간 경쟁에서 밀린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월남전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참전하는 나라들은 미국으로부터 받는 다양한 경제적 지원으로 인한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파병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 달러가 많이 필요했는데 파견나간 인력들의 봉급을 국가에서 외환은행을 통해 의무적으로 송금하게 하였으니 외화수입이 엄청나게 들어왔던 것이다.

 

주월 미군사령부의 민간인 기술자 차출에 대한 신속한 대응책이 미미하자 당시 실세였던 김종필 씨가 이 같은 현지 상황을 접해 듣고 대안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결원된 인력을 국내에서 충원하면 신원보증, 재정보증, 사상보증 등을 거쳐야 해서 매우 까다로웠다. 특히 해외여행 결격사유가 있는지를 조사하는 시간이 2~3개월 걸렸는데 아무리 급해도 이 과정을 생략하기는 어려웠다. 정국이 불안하였고 경기가 좋지 않아 이것을 풀어버리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대안이 현지제대였다. 월남에서 인력을 파견한 사업이 달러 획득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수출 1억불이 기업 활동을 통해 거둔 최고성과였을 정도로 나라엔 돈이 없었다. 이에 현지에 파견된 병력 중에 이미 제대 시기가 지났거나 1,2개월 남은 전역 예정자 중에서 일부를 차출하여 현지 제대를 시키고 민간 인력 충원이 필요할 경우 바로 충원하게 하는 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기회였다. 한국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가 쉽지 않지만 월남에서 현지 전역을 하여 민간 기업으로 취업을 하면 급여도 최소한 3~4배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나는 현지전역을 신청하여 1970430일 약 6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아마도 대한민국 국군역사 중에서 사병으로 이렇게 오래 근무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지전역 제도가 생긴 뒤로 전역자 중에서 신청을 받아 T.O가 나는 대로 50, 100명 단위로 전역을 시행하여 3~4년간 약800여명이 현지제대를 하였다. 나는 월남 비둘기 부대에서 1966년 말부터 703월까지 만 4년간 복무를 하였다. 그러다 현지제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내가 전역 신청서를 제출하니 기무사에서 좋은 제안을 하였다. 내가 귀국하여 광주 보병학교를 나오면 준위를 달고 기무사로 가게 해 준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당시 준위 봉급이 7,000원이었는데 내가 있던 방첩대에서 업무역량을 높게 평가해서 그런 제안을 한 것이라 생각한다. 만일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여 귀국을 하였다면 내 인생은 전혀 다르게 전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월남에서 넓은 세상을 경험하였고 미군의 영향력과 위력을 경험하였기에 그 제안이 눈에 차지 않았다. 또한 급여도 내가 월남에서 복무하면서 받는 것에 비해 30%정도 덜 받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공무원의 처우가 좋지 않았을 때여서 그렇게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었다. 나는 제대하고 현지 미국기업에서 봉급을 최소 400불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거절을 하였다. 그렇게 기무사에서 보병학교에 가라는 추천도 뿌리치고 현지 제대를 하게 되었다.

 

제대 후 미국계 기업에서 현지 채용을 하는데 주월 한국군 전체에서 여러 부대를 거쳐서 채용인력이 방문하여 선발을 하였다. 그때 비둘기부대에서는 5명 뽑는데 50명이 지원을 하였다. 당시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들은 PA&E, Vinnel, Pilcoford, RMK, USAID, ITT 등이 있었다. 미국 기업 민간인들이 15, 한국인들이 2만 나와 있어서 수송, 전기. 통신 등 모든 용역을 민간에서 지원했다.

나는 발전공으로 지원했다. 당시 현지 취업자들은 영어가 매우 서툴렀다. 미국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매우 중요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직원들이 나와서 면접을 하는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지원자 1인당 3분씩 영어로 면담하겠다고 부대에 제안을 하였다. 나도 카투사로 복무하였고 미군들과 현지인들 사이에서 영어와 베트남 어를 사용하며 나름 언어적으로 자신이 있었지만 전문 기술 분야는 전혀 모르는 또 다른 도전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기술적인 부분 보다는 그저 부대 관련 업무나 일상용어 등을 통역했기 때문이다.

이에 면접을 앞두고 나는 영어로 된 발전기 관련 매뉴얼을 달달 외워서 면접관 앞에서 그대로 말을 하였다. 듣기에는 상당히 유창하고 전문적인 내용이 들어 있어서 신선하게 느껴졌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지금 말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니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다. 솔직한 접근이 유효했는지 5인 안에 들어서 선발되었다. 무려 101의 경쟁을 뚫은 것이다. 그래서 취업하게 된 회사는 PA&E 라는 회사였는데 이 회사는 미 육군 재향군인회에서 하청을 받아서 보낸 회사였다. 미국계 회사라 처우도 좋고 근무환경이 좋아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박상호, 고독한 오지의 한국인, 희망사업단, 서울 2017)

다음 호에 계속
재창간 3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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