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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인생의 전환점, 월남파병
어르신자서전: 2017년도 제작 <고독한 오지의 한국인>의 저자 박상호 님(4부)
기사입력  2018/01/29 [15:35] 최종편집   
▲파병 환송장면

어르신자서전: 2017년도 제작 <고독한 오지의 한국인>의 저자 박상호 님(4부)

두 번째 인생의 전환점, 월남파병

 

당시 사병 복무기간이 30개월이었다. 요즘처럼 카투사로 지원하면 전역 때까지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18개월마다 순환 배치를 하던 시절에 나는 3개월을 더하여 21개월을 복무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 인생에 있어 전환기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월남 파병이었다. 내가 군대 생활을 한창 하던 196459일 미국은 한국 등 25개 우방국에 베트남전 지원을 요청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월남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6개월만 복무하면 전역을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군에 배치된 뒤에 반전이 일어났다. 나는 작전처 상황병으로 있었는데 탈영사건 이후 불편한 자대에서 계속 근무를 하고 싶지 않아서 전출을 신청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심 끝에 나는 연대 인사과 하사에게 월남 파병 면담을 요청하기로 하고 그를 찾아갔다. 처음엔 담당 하사가 안 된다고 했는데 내가 정 안되면 다른 사단이라도 전출을 보내달라고 말하니 그건 가능하다고 하였다. 마침 그 무렵에 상부에서 지침이 내려와 전역이 1년 미만 남았던 나도 월남에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월남 파병을 위한 훈련소는 화천에 있었다. 나는 이곳으로 배치를 받아 4주간 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훈련이 장난이 아니었다. 당시는 군대에서 구타가 일상적이었는데 실전에 투입된다고 하여 군기가 엄청 셌고 구타도 더 심했다.

당시 영관급 이상은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베트남으로 갔고 위관급 이하는 부산항에서 배로 갔다. 부산으로 가는 열차 유리창은 모두 철조망으로 막아 놓고 각 칸마다 헌병들이 양 객차 옆에 서서 나오지 못하게 지키고 있었다. 춘천역에서는 한밤중인데도 적십자 부녀회에서 나와서 김밥, 사과, 사탕 등을 철조망으로 넣어 주었다. 당시에 전투부대 배치를 받은 사병들이 갑자기 두려움이 생기면서 기차를 타고 가다가 유리를 깨고 대열에서 이탈하는 사고가 나면서 이후부터는 경계를 강화하고 통제를 하게 된 것이다. 춘천에서 용산역으로 들어오는데 밤 12시경임에도 불구하고 대령 30여명이 플랫폼에 도열하여 기차가 다 떠날 때까지 거수경례를 하였다. 참으로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부산에 도착하자 우리 파병부대원들을 위해 부산항에서 대대적인 환송식을 거행하였다. 부산항 제3부두에서 출항할 때 환송식을 하였다. 3군 사령관, 부산 시장, 부산 전체 여고생 수천 명이 나와서 환송식을 하였다. 그렇게 전쟁터로 가는 병사들을 크게 격려하였다. 우리는 LST라는 2천 명 정도 수송이 가능한 수송선을 타고 베트남으로 갔다. 그 배는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사용하던 것이었다. 부산에서 베트남까지는 배로 8일을 가야하는 먼 거리였고 군함이었기 때문에 결코 편하지 않은 여정이었다.

드디어 배가 서서히 출발하며 뱃고동을 울리자 기분이 좀 이상해 졌다. 생전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얼마나 오랜 기간의 여정이 될지...

오래된 LST는 요동하는 거친 바다를 헤치며 항해를 하였다. LST는 수송선이라 내무반에 침대가 있었다. 배가 롤링과 피치를 반복하여 좌우로 앞뒤로 흔들리는데 얼마나 크게 요동을 치는지 선실에서 창문으로 내다보니 바다가 바로 옆에 벽처럼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난생 처음으로 배를 탄 대다수의 병사들은 배 멀미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였다. 식사를 해도 배 멀미로 인해 먹은 것을 다 토하고 난리가 났다.

그렇게 갖은 고생 끝에 베트남에 도착하였고 우리는 비둘기 부대 소속으로 사이공 외곽 16km지점에 있는 디안으로 이동하여 자리를 잡았다. 비둘기 부대의 공식명칭은 건설지원단이었다. 건설지원단은 현지에서 도로 놓고 다리 놓고 학교, 병원도 지어주었다. 이전에 월남에서는 우리를 다이한이라 하였다. 대한(大寒)이라고 매우 추운 나라라는 뜻이었다. 지금은 한국이라고 한다. 비둘기부대에서는 건설 지원과 함께 의료 지원도 하였다. 빈 교실에서 의료지원을 하면 진단받고 약을 나눠준다. 공짜로 치료해주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비둘기부대 영내에 있는 기술학교에서 타자, 재봉, 태권도 등을 가르쳤다. 당시 월남에 탈곡기가 없어서 사용법도 지도하는 등 다양한 대민지원을 했다.
(박상호, 고독한 오지의 한국인, 희망사업단, 서울 2017)

다음호에 계속
재창간 3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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