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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가는 허기(虛飢)의 시대
어르신 자서전: <고독한 오지의 한국인>의 저자 박상호 님(2부)
기사입력  2017/11/20 [20:42] 최종편집   

 

▲집필 중인 저자 모습


어르신 자서전: <고독한 오지의 한국인>의 저자 박상호 님(2)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가는 허기(虛飢)의 시대

 

나는 수원 소화국민학교(천주교 계열)에 입학하여 3학년까지 다녔다. 나는 7살인 195012월에 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소화국민학교 1학년으로 입학을 하였고 51년에 2학년이 되었는데 한글을 몰라 낙제하여 다시 1학년부터 다녔다.

우리 집은 초등학교에서 20리나 떨어져 있었고 집 뒤에는 수봉산이 있었다. 그 산에서 우리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봄에는 아카시아 꽃과 진달래꽃을 따 먹고 산에 있는 어린 소나무를 먹기도 했다. 어린 소나무는 껍질을 벗기면 얇고 하얀 속껍질이 나오는데 그것을 먹을 수 있었고 오래 씹어야 해서 허기를 면하는 데는 나름 효과적이었다. 소나무 속껍질은 그럭저럭 먹을 만 했는데 먹으면 변비가 생기는 것이 문제였다.

우리 학교 옆에는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혜성고아원이 있었고 거기에 있는
10여명의 아이들도 우리 학교를 같이 다녔다. 그때는 전쟁고아가 너무도 많아서 외국 원조에 의거한 종교기관 등에서 학교와 고아원 등 사회 복지제도의 공백을 채워주고 있었던 시절이다. 당시 고아원생들은 거의 다 초등학생들이었는데 고아들은 오히려 미군 등에서 지원을 받아서 도시락을 싸왔고 부모님이 있는 일반 가정아이들은 대부분 너무도 가정환경이 열악하여 도시락을 싸오지 못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한 학급 5,60명 되는 아이들 중에 30%정도만 도시락을 싸오고 나머지는 밥을 싸오지 못했고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선생님이 점심을 싸온 아이만 교실에서 밥을 먹게 하고 안 싸온 아이들은 추운 겨울인데도 밖에 나가있게 했다. 고아원생들은 조기반찬에 혼합잡곡 밥을 먹었는데 나는 그들이 밥 먹는 것을 구경만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위화감을 느낄까 봐 취한 조치 같았는데 그것이 더 서러웠다.

당시 인천에서 가까운 연평도에 조기가 무척 많아서 지금과는 달리 서민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 조기였다.하루는 내가 친구들과 밖에서 창문너머로 애들끼리 밥 먹는 것을 보다가 말다툼이 나서 싸우기도 하였다. 그래서 코피 나게 싸워서 선생님에게 또 맞기도 하였는데 너무도 서러웠던 기억이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어린마음에 부모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 나도 고아원 아이들처럼 학비도 면제를 받고 도시락도 싸와서 맛있는 조기반찬도 먹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아들은 점심을 싸오는데 오히려 부모님이 있는 나는 점심을 굶어야 했던 시절의 서글픈 기억이다.

당시 월사금(등록금)은 월 1, 12회를 내야 했는데 1개월에 200환이었다. 겨울에 난로가 교실 한가운데에 있는데 월사금을 낸 아이들은 석탄 난로주변에 배치하고 내지 못한 애들은 외곽에 앉게 하였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비교육적인 환경이었는데 당시 교사들 수준도 높지 않고 모든 것이 열악하여 그랬다고 생각된다. 우리학교에는 20대 유부남 학생도 있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공부할 때를 놓쳐서 한글이라도 깨우치고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전쟁의 폐허 위에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 민족의 아픈 시절, 서글픈 우리의 자화상이다.

 

어렵사리 인천 학익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집안 경제사정으로 인해 바로 중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1년을 쉬게 되었다. 가난한 노동자인 아버지께서 홀로 가정의 모든 생계를 부양하시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을 쉰 뒤에 인천 황해중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전남 광주에 사레지오 중학교에 1학년으로 재입학을 하여 결과적으로 또래보다 2년이나 늦어지게 되었다.

나는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한글을 몰라서 1학년을 두 번 다녔고 집안 사정으로 인해 초등학교 졸업 후 1년을 쉬고 중학교 1년을 두 번 다녀서 또래보다 두세 살이 많았다. 이에 47년생인 내 동생과 같은 학년이 되었다. 그렇게 내가 나이가 많아 고등학교에 가니 고220세가 되어 신체검사를 받고 고2 겨울방학 때 입영영장이 발부되었다.

당시 대학생은 입영이 연기되었는데 고등학생은 연기가 되지 않아서 군대를 가야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에게 입영영장을 발부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당시는 군사정권 초기라서 군 입대에 대해 매우 엄격한 방침이 적용되었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여겼을 것이다.3 진학을 앞둔 겨울방학 때 학교에 말도 하지 못하고 2월에 논산훈련소로 입소하였다.(박상호, 고독한 오지의 한국인, 희망사업단, 서울 2017)
다음호에 계속
재창간 2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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