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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할아버지 시대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의 역사
어르신자서전: <고독한 오지의 한국인>의 저자 박상호 님
기사입력  2017/11/08 [18:55] 최종편집   

 

▲ 1.4후퇴 장면

어르신자서전: <고독한 오지의 한국인>의 저자 박상호 님

증조할아버지 시대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의 역사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천주교(구교) 집안이다. 흥선 대원군 때 증조할아버지(박화규 님)께서 천주교 신자여서 순교를 당하셨다. 구한말 천주교도는 정부에서 간첩으로 분류해 잡히면 고문을 받거나 심지어는 처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당시 대원군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천주교를 믿었던 경력이 있으면 무조건 잡아다가 처벌을 하였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많다. 동학 농민운동 때도 그런 방식으로 운동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죽였다. 그렇게 정부가 가혹하게 학대를 하던 엄혹했던 시절이었다. 대원군이 명성황후와 대립관계였는데 명성황후가 천주교도여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증조부님은 슬하에 사형제를 두셨는데 안타깝게도 천주교임이 드러나 체포가 되어 참형을 받아 목이 잘려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래서 증조할머님께서는 포졸에게 돈을 주고 겨우 남편의 수급만을 가지고 나올 수 있었는데 그나마 다른 포졸들에게 걸려서 산으로 도망을 가야만 했다. 당시 위치가 충남 서산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증조할머니께서는 어쩔 수 없이 겨울에 남편의 수급(首級)을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넣은 뒤 낙엽을 덮고 도망갔다. 겨우 추적을 따돌리고 다음날 그곳에 다시 와보니 증조할아버지의 수급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후 증조할머니께서는 박해를 피해서 아들들을 피신시키기로 결심하셨다. 한곳에 같이 살면 자칫 일가족이 다 몰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이에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형제분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기로 하였다. 그래서 4형제는 함경도,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로 각각 흩어졌다. 박해를 피해 한 명이라도 살아남자는 뜻이었다. 우리 할아버지(박순화 님)는 경기도 양주에 정착하셔서 우리 집안의 본적지로 삼으셨다. 지금도 양주 고향에 가면 증조할아버지의 본명(세례명)을 딴 성당이 있다. 우리 집안은 그렇게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머물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천주교에서는 순교한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했는데 우리 증조부님은 아쉽게도 시성(諡聖)이 되지는 못하셨다. 하지만 내가 천주교 계통 학교를 다닐 때는 순교자의 자손이라 해서 관심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형제들이 헤어진 뒤에 한동안 가족들이 못 만나다가 우리 아버지 대에 와서 충청도에 흩어진 옹기 굽는 육촌 형제들을 찾아가 만난 적이 있다. 세월이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흩어진 후손들이 서로를 찾게 되었으니 박해의 트라우마가 참으로 깊었다고 생각된다. 당시는 대놓고 전도를 할 수 없는 엄중한 시기여서 포교활동을 해도 도망갈 곳이 있는 외곽지역에서 우선적으로 시행하였다.

 

나는 1944년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암리 264번지에서 태어났다. 원래 우리 박씨(朴氏) 집성촌이 양주였다. 아버님(박복만 님)1907년생이시고 어머니(김복희 님)1917년에 태어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이 차이가 좀 나셨는데 그 이유는 어머니가 후처로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아버님의 전 부인은 결혼 후 2,3년 있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에 의료기술도 발달되어 있지 않은 열악한 상황이라 평균수명이 40세 밖에 안 되었고 이런 저런 질병 등으로 젊은 시절 죽는 일이 허다하였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30세가 넘어 어머니와 재혼하셨고 어머니는 20세인 1937년에 결혼을 하신 것이다.

내가 7세인 19506월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우리 양주는 38선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어서 처음에는 피난을 갈 시간적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정신없이 전쟁이 진행되었는데 약 6개월이 지나 다시 국군이 전선을 밀어 올렸다가 중공군에 밀려 내려오게 되면서(1.4 후퇴) 우리는 급히 피난을 가야만 했다. 수도권에 살던 사람들은 삽시간에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공산당은 지주, 자본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다. 우리 집안은 천주교 집안이었기 때문에 또 다시 박해를 받았어야 했던 것 같다.

 

첫 남침 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죽이며 지냈는데 두 번째 후퇴 때는 필사적으로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50년 겨울, 국군과 미군이 급하게 밀린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가족도 한겨울에 피난길을 떠나야 했다. 한밤중이었는데 멀리서 ~~” 하는 대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우리 집을 비롯한 동네 사람들이 서둘러 피난을 떠났던 모습이 생각난다.

▲1.4후퇴 당시 아이들 모습


그때 나는 겨울이라 두꺼운 솜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대님 같은 끈을 허리띠로 사용했다. 바지가 좀 커서 그랬는지 너무 꽉 묶어서 좀 불편했다. 갑자기 피난을 가게 되면서 어머니께서 밤에 자는 나를 급히 깨우셨다. 나는 자다 일어나 소변을 보려했는데 어머니께서 급하시니까 그냥 솜바지를 입히고는 동생들을 챙기시고 있었다. 나는 급해서 소변을 봐야 했는데 바지 끈이 너무 꽉 묶여 있어서 풀 수가 없어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못 참고 바지에 오줌을 쌌다. 아무리 내가 어렸어도 밤에 자다 일어나서 그런지 솜바지가 다 젖을 정도로 양이 많았다.

런데 아무도 신경을 써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나도 그냥 말하지 않고 그냥 출발했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 추운날 젖은 바지가 얼어서 얼음이 날카롭게 되어 걸을 때마다 사타구니가 긁혀 상처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참을 걷다보니 사타구니가 너무 쓰라렸다. 사실, 당시 나도 아버지 등에 업혀 가야만 했던 나이였는데 그 힘든 상황에서 내색도 하지 않고 목적지까지 걸어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대견했던 어린 시절이었던 것 같다. 빈집에서 쉬는데 바지를 벗겨보니 양쪽 사타구니가 다 벗겨져 있었다. 이에 어머니께서 놀라시며 새 옷으로 갈아입혀 주셨지만 이후로도 며칠간 상처 부위가 너무 쓰라려서 고생을 많이 했다.

 

우리는 그렇게 피난을 떠나 양주에서 수원까지 갔다. 피난을 가다가 더 이상 공산당의 위협이 미치지 않는 수원 정도에서 여장을 풀 수 있었다. 그리고 전선은 다시 북상하여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다시 양주로 가지 않으시고 수원에 정착을 하셨다. 수원은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이었는데 아버지께서는 전선에서 가까운 양주가 위험하다고 여기셨던 것 같다.

(박상호, 고독한 오지의 한국인, 희망사업단, 서울 2017)

다음 호에 계속
재창간 2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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