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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농의 외아들, 재단사는 나의 운명
어르신자서전: <늦게피운 꽃이 향기롭다>의 저자 최한준 님(1부)
기사입력  2017/09/12 [18:25] 최종편집   

 

▲한창 때의 저자


어르신자서전: <늦게피운 꽃이 향기롭다>의 저자 최한준 님(1)

빈농의 외아들, 재단사는 나의 운명

 

나는 1948910일 경북 경산군 진양면 북동 7번지에서 태어났다. 호적에는 48년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46년에 태어났다. 당시 영아 사망률이 높아서 태어나자마자 호적에 올리지 않고 1,2년 있다가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내가 태어났던 1946년은 해방이 된지 얼마 안 돼 행정시스템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더욱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아버지는 1900년생이셨고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셨다. 어머니는 1913년 생으로 아버지와 나이차이가 13년이나 났다. 아버지가 29, 어머니가 16세에 결혼을 하셨는데 나는 어릴 때 어머니가 후처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나이차이가 많이 나셨다. 아버지는 701470세로 소천하시고 어머님은 88년에 76세로 소천하셨다. 의료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아이를 많이 낳아도 병에 걸리거나 하면 치료도 못해보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형님 둘은 모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모두 5세 이전에 돌아갔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저절로 우리 집안의 독자가 되었다.

또 하나 어린 시절의 변화는 아버지께서 내가 5살 때 양자로 입적을 하신 것이다. 양자는 어린 시절에 아들이 없는 집안에만 들이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서는 필요에 따라 등록을 하곤 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도 3형제 중 막내였기 때문에 집안을 위해 양자로 가셨다.

청주에 계신 5촌 당숙에게 입양되셔서 우리 가족 모두 청주로 이사하게 되었다. 집근처에는 무심천이 흐르고 인근에 청주공고, 청주여중, 주성초등학교가 있다. 지금은 청주시청과 상당구청이 자리하고 있어서 청주시의 중심지이다. 그때 내 나이가 다섯 살 이었다. 난 집 근처에 있는 주성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주성중학교 입학이 확정되었다.

 

▲재단장면

 

중학교 합격서류를 받았는데 마침 아버님께서 소작계약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농사를 지을 권리마저 계약에 의해 중단되었던 것이다. 땅이 없는 설움, 그것은 생존의 수단을 박탈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토지는 삶의 근원과도 같은 것인데 땅이 없는 서민들은 늘 이렇게 불안정하고 고단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토지(土地)에 대한 문제는 어린 시절 나에게 깊이 각인 된 것 같다. 아버지는 평생을 가난과 싸우며 사셔야 했다. 그러나 나는 이 가난을 절대로 대물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재단사로 가는 길

 

내가 비록 나이가 어렸으나 집안 사정이 어떠한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기술을 배워서 부모님을 봉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중학교 입학 서류를 받자마자 이를 반납하고 나의 짧았던 학창 시절을 마감하였다.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14, 지금의 중1 나이인 어린 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마침, 이웃 형님이 양복 기술을 갖고 양복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모든 일은 작은 인연의 끈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 같다. 내가 만약 그분을 만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분을 만났으면 나는 아마도 제빵 일을 할 수도, 구두 일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공장에서 일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처음 인연이 옷을 만드는 일이라니 생각보다 괜찮은 인연이었다. 그 형님 소개로 양복점에 취직이 되었다. 청주에 있는 형제라사라는 양복점이었다. 처음에는 기술자들의 뒷수발을 드는 일부터 시작한다. 아무 기술도 없는 견습생 신분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니 일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한 상황이었다. 그냥 고용 계약 같은 것도 없이 잔심부름을 하면서 일을 배우고 월급날이 되면 수당조로 약간의 비용만을 주었다.

견습생 생활을 1~2년 하다보면 양복에서 좀 쉬운 편에 속하는 하의제작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하의 제작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월급이란 개념도 생기게 된다. 하지만 하의 작업은 난이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많은 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또 그렇게 2~3년이 지나면 양복의 꽃인 상의제작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 상의공이 되면 월급쟁이가 아니라 장수대로 받으니 수입이 좋았다. 하의공보다 상의공의 수입은 5배 이상 되었다. 나는 14세에 양복점에서 일을 시작하여 19세부터는 가족들 생활비를 거의 다 충당할 수 있었다.

20세가 되면서 나도 상의공이 될 수 있었다. 상의공이 되어야 비로소 옷을 만드는 기술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 상의공이 되면 사실상 양복 한 벌을 다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한 벌 당 얼마씩 받고 일을 하게 된다.

양복기술의 최상위에는 재단사가 있었다. 요새말로는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겠다. 재단은 양복관련 기술 중에서 가장 고급기술이다. 재단사는 양복을 설계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양복제작의 총괄기술자가 재단사이다. 일단, 재단사가 되면 비로소 자기의 사업장을 차릴 수 있는 자격을 모두 취득했다고 볼 수 있었다.

나도 열심히 양복을 만들면서 끝내 재단도 배웠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재단사까지 되지는 않는다. 생각보다 종합적인 감각과 눈썰미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없는 사람들은 몇 년을 해도 기술이 늘지 않아 결국 포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14세부터 청주의 라사로 양복점에서 96개월간 일을 하여 양복을 만드는 모든 과정을 익힐 수 있었다. (최한준, 늦게피운 꽃이 향기롭다, 희망사업단, 서울 2017)

다음 호에 계속
재창간 2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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