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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서울로 올라와 성공한 해방둥이 장녀의 삶
어르신자서전 : <멍텅구리 사랑>의 저자 이정희님 제1부
기사입력  2017/07/20 [14:14] 최종편집   

 

▲미용학원 동기들과 저자


어르신자서전 : <멍텅구리 사랑>의 저자 이정희님 제1

19세 서울로 올라와 성공한 해방둥이 장녀의 삶

 

나는 해방둥이이다. 19452,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이 어두웠던 시절에 태어나 광복을 맛본 해에 태어났다.

 

충남 아산, 따뜻한 온천이 나오고 사람들이 정이 많은 아름다운 지역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우리 집 앞마당에는 홍매화, 노랑매화, 흰매화, 장미, 연분홍, 샛노란색 등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득한 꽃동산이었다. 동그랗게 원으로 만든 화단에는 꽃과 더불어 나비와 벌들이 날아다녔다. 집 근처에는 은행나무, 앵두나무, 살구나무, 느릅나무 등 수많은 나무들이 있었다. 온양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동네에는 늘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때론 서울서 소풍 올 때도 우리 집으로 지나가기도 했다.

 

당시 우리 집에 꽃이 많았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꽃을 따주기도 했다. 지금은 신혼여행을 제주도나 해외로 가는 경우가 많지만 그 당시는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오는 커플이 상당히 많았다. 옛날엔 가을이 되면 집 근처에서 은행만 두 가마씩 따곤 했다.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공부는 많이 하지 못했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끊임없이 공부를 하고자 했다.

 

▲저자의 초등학교 시절


한국전쟁 당시 우리 집이 피난길 중간에 있으니 오가던 이들이 우리 동네에 정착하여 몇 개월간 살았던 적도 많았다. 피난민의 생활이란 지금으로 보면 난민과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아버지는 결혼 하신 뒤에 입대하시고 어머니 혼자 있는데 어린 동생들이 있으니 나 역시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갈 형편이 못되었다. 당시는 고등국민학교가 있어 한글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20세 된 사람도 초등학교에 오기도 했다.

 

19세에 아무 연고 없는 서울에 올라와서 화장품 판매원에서 시작하여 신당동에 작은 점포를 내고 옷가게를 창업하였다. 여동생과 같이 살면서 화장품 방문판매 일을 하니 돈이 잘 모였다. 시골에 살 때 절에서 살림을 하면서 몸으로 깨우친 것은 근검절약하는 삶이었다. 산 속 절에서 돈 쓸 곳이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서도 특별히 돈을 쓰지 않고 일만 열심히 하니 돈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은행 같은 곳에 돈을 모아 두기 보다는 주변에 사는 지인들끼리 기간을 정하고 돈을 모아 목돈을 만드는 가 일상화 되어 있었다.

 

서민들 사이에 목돈 마련 수단이 되었던 계는 계주가 돈을 떼어 먹고 달아나는 등의 폐해도 적지 않았지만 금리가 10%를 넘는 등 고금리에 목돈을 쉽게 마련할 수 있는 서민금융 수단이었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활용되었다. 나도 화장품 방문 판매를 하면서 계를 통해 목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첫 번째로 모은 돈 300만원을 가지고 계주의 집이었던 신당동 집을 샀다. 당시는 집값이 저렴했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집을 살 수 있었다. 또한 집값도 가파르게 상승했기 때문에 대부분 서울에 정착한 사람들은 여유가 되면 집을 마련하였다. 서울서 별별 일을 다 해서 돈을 모았다.

 

당시에 50만 원짜리 계를 10(500만원짜리 계)는 했다. 엄청난 금액이었다. 계를 내고 5~6년 만에 300만원에 집을 인수했다. 그렇게 점점 자산이 쌓인 것이 2,000만 원 정도나 된 것이다. 당시 몇 백이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던 금액이었기 때문에 실로 엄청난 자금을 보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이 나에게 온 두 번째 기회였다.

19세에 서울로 올라와 약 16년간 홀몸으로 장사를 했다. 그때는 젊어서 내 자산이 다 머리에 있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일들을 해도 두려움이 없었고 무엇을 해도 자신감이 있었다. 게다가 집안을 일으켜 보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것이라 분명한 목표도 명분도 있었다.

 

그런데 남동생 부부와 같이 일하면서 점점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얻는 기쁨이라면 사업적으로 성장하는 것과 아이들이 자라는 것이리라. 그런데 나에겐 둘 다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점점 지쳐갔다. 세월에는 장사가 없었다. 어느덧 내 나이가 38세에 이르렀다. 나이도 먹고 마음도 지치니 쉬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단골손님 중에 성당에 다니시는 분이 계셨다. 그분이 내가 늘 우울해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자꾸 성당에 다니자고 해서 위로 차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도 자꾸 나가면서 미사도 봉헌하고 기도생활도 하니 잠시라도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신앙의 힘이란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뭔가 능력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당에 다니면서 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공급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또 하나의 인연을 만나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이정희, 멍텅구리 사랑, 희망사업단, 서울, 2016>

 

 재창간 2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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