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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호의가 만들어준 소중한 기회
관악에서 만들어 가는 지혜의 숲: 첫번째 지혜의 나무 故 유선익 님 4부
기사입력  2016/06/24 [19:32] 최종편집   

 

▲  50년대 피난민 아이들


관악에서 만들어 가는 지혜의 숲: 첫번째 지혜의 나무 유선익 님 4

작은 호의가 만들어준 소중한 기회

 

아무 연고 없는 사람에게 베푼 호의는 반드시 돌아오는 것 같다.

 

나는 그냥 지나가도 되는 것을 쓸데없이 끼어들어 그 언쟁의 이유를 물었다. 이에 20대인 청년이 말하길, 30대쯤 보이는 사람에게 이승만 정권 타도에 동참하여 달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이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의용군 입대 권유를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37세 정도 되는 사람의 말인즉, 나는 지병이 있어 몸이 약하여 군대 생활이 어렵다고 사정을 말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몸도 약하고 병색도 완연하여 보였다. 이에 좀 더 활기차고 용기 있는 사람을 택하고 이 사람을 보내줄 것을 말하니 20대 청년이 동무는 누구냐고 물었다. 이에 내가 서대문구청 직원 신분증을 보여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내주었다.

 

이 일로 인해 그 30대 후반인 사람과 친해졌는데 참으로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 하며 자기 집에 같이 가자고 하였다. 이에 나는 동의하고 이름을 물은 즉 윤현표라 했다. 그는 부산세관 감시국장이었고 아버지는 재무부 이재국장이라는 것이다. 묘한 인연이었다. 그가 말하길, 나는 공포 속에서 살고 있고 또 다시 어떤 불편한 사태에 처할지 모르니 당분간 내가 자기 집에 살면서 출근하면 어떻겠냐고 하였다. 이에 나 또한 독신으로 지내며 현재 구청에서 지내고 있으니 이를 승인하고 그의 집에서 출퇴근하기로 했다.

그 당시 그 집 식구들은 두 내외와 여동생, 이렇게 셋이 살고 있었다. 그렇게 10여 일을 지내고 있는데 UN군 공습이 날로 심하여 외출이 어렵게 되자 그 집에 가지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대한인의 방랑과 사랑, 유선익 저, 희망사업단, 서울 2015, 56~57)

 

혼란스러운 시국에서는 적과 아군이 순식간에 변하기도 한다. 어르신은 아무런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었다. 한번은 남로당에 가입한 사람을, 한번은 이승만 정부의 요직에 있었던 사람을 도와준 것이다. 그 결과는 더 큰 호의로 돌아오게 된다. 격변의 시절을 대비하는 가장 큰 지혜중의 하나는 대가없는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닐까?

 

윤현표씨에게 베푼 호의는 서울이 수복된 뒤에 다시 1.4 후퇴를 만나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더 크게 돌아온다. 아무 연고 없는 부산에 도착한 저자는 세관에서 윤현표 국장을 찾아갔다.

 

나는 세관에서 윤현표 국장을 찾아 만났다. 그도 반갑게 나를 대해 주었다. 지난 일들을 설명하고 현재 급한 것이 먹고사는 것이니 이를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그가 반갑게 주선하여 줄 것을 약속하며 부산 남포동 입구에 있는 뉴 그랜드 댄스홀이라는 곳으로 인도하였다. 나는 이 모든 것에는 관여하지 아니하고 다음날 아침 홀 청소를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만주에서 서울을 거쳐 반도의 끝인 부산에 오니 부산 사투리가 어려워 대화 중 약 30%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몇 달 지속하다 보니 점점 익숙해지고 이 지역 풍습도 알게 되어 종업원 간의 우애도 깊어지게 되어 그런대로 살 만하게 되었다. 댄서들의 학력은 고졸이 50% 정도이고 나머지는 국졸, 중졸이 50% 정도였다. 가정 사정도 천차만별이어서 독신으로 있는 사람도 있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댄서가 된 사람 등 여러 사연이 있었다. 이들도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니 여러 가지 증명 서류가 필요하였다. 이를 스스로 작성할 수 있는 사람은 문제가 없었으나 이조차 안 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대서를 해 주어야 했다. 당시만 해도 문맹률이 높아서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되었다. 나는 그들 중에 고학력자였으니 이런 사람들을 도우면서 인정을 받게 되어 일상생활이 점차 원만하게 되고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대한인의 방랑과 사랑, 유선익 저, 희망사업단, 서울 2015, 60)

 

 

여기서 일을 하면서 수입은 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하루는 미군이 맥주 한 트럭을 줄테니 사겠냐고 했다. 그래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사겠다고 하니 정말로 맥주 한 트럭을 가져왔다. 이에 거래했던 환전상들이 돈을 꿔 주면서 맥주를 판매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된다. 이에 목돈이 생기면서 댄스홀 인근에 양식집을 개업하라고 권유하여 가게 이름을 ‘QUEEN'으로 하고 개업을 하여 작은 성공을 거두게 된다.

 

한국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부산은 모든 물자와 행정, 인력이 모인 수도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특히 미군과 관련된 사업은 무조건 되는시기에 저자는 우연한 기회에 도와준 윤현표 씨의 도움으로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물론 기회가 왔다고 해서 다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만일 어르신께서 댄스홀에서 청소하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런 곳에 나를 소개할 수 있나 하며 그만 두었다면 아무런 효과도 없었을 것이다.

 

▲부산민군Px

 

하지만 작은 기회를 살리면서 성실하게 일하니 주위사람들에게 실력을 인정받게 되어 큰 기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도 혼자 힘으로 선 것이 아니라 수많은 주위사람들과의 교류와 협력의 결과로 오게 된 것이다.

만주 출신으로 단신으로 월남한 20대 청년이 전쟁 중에 부산에서 미군과 그 업계에 관계된 사업을 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이것은 단번에 된 것이 아니라 작은 호의에서 부터 시작되어 성실과 신뢰로 가꿔온 관계가 가져온 열매였던 것이다.

 

다음 호에서 계속

유명종/ 희망사업단 대표

재창간 2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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