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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지혜와 아들의 실수
■관악에서 만들어 가는 지혜의 숲: 첫 번째 지혜의 나무 故 유선익 님 3부
기사입력  2016/06/09 [17:20] 최종편집   

 

▲8.15 해방 당시 전경


관악에서 만들어 가는 지혜의 숲:첫 번째 지혜의 나무 유선익 님 3

아버지의 지혜와 아들의 실수

 

광복군 무관학교가 해체되면서 대학으로 진학하신 유선익님은 단국대 법대에 1기생으로 들어가시게 된다. 해방직후의 공간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중국 만주에서 단신으로 23세에 월남하신 어르신은 20대 중반에 큰 기회를 얻게 된다.

 

아버지는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작승동에 논밭을 사 놓으셨다. 이 지방은 아버지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곳이다. 아버지 본적은 평북 성천군 영천면 송강리요 생전에 경상도에는 간 일이 없으시다. 아버지는 고향인 평북 성천에 대대로 살다 가세가 어려워 러일 전쟁 때 일본이 러시아를 정복하고 블라디보스톡에 진주할 때 종군하여 살았을 뿐이다. 블라디보스톡으로 갈 때 맏형의 가정교사가 동행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곳에서 오래 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조선으로 귀국할 것을 마음먹었다.

 

이에 그간 모은 재산을 조선으로 송금할 것을 목적으로 가정교사가 귀국할 때 거액의 돈을 보냈다. 그 후 약 1년 정도 러시아에 체류하다 우리 가족은 전부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가정교사는 고향인 경북 의성으로 가서 골패(일종의 도박)로 돈을 소비하였다. 아버님은 그래도 남는 돈이 있을 것이니 돈을 내놓으라 하여 그는 하는 수 없이 남은 돈을 내놓았는데, 그 돈으로 현지에서 논밭을 사고 관리인으로 김도희를 선정하여 매년 소작료를 송금하도록 하였다. 이 소작료는 1945년 조국이 광복 될 때까지 보내 주었다.

당시 만주에서 우리 집안의 식량은 의성에서 보내 주는 소작료로 충당할 수 있었다. 이 관계는 우리 가족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사하여 함북 경원에 정착하고 해방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내가 해방될 때 23세였으니 거의 25년간 지속된 것이다. 이 재산이 내 형들이 다 죽고 나니 넷째인 내가 임의로 매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땅을 팔기 위해 나는 경북 의성으로 갔다...관리인은 가격은 평당 70원이라며 총 12만원으로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였다. 나는 당시 주변 논밭의 시가도 모르고 적정 가격도 몰랐으나 그분이 권하는 대로 12만원으로 하였다. 거래는 간단하게 성립되었지만, 매수인인 소작인이 당장 돈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이 땅이 아니면 농사지을 수 있는 땅도 없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매수인의 친척들이 나서서 소를 한 마리씩 주기로 하고, 의성읍의 소 장날에 만나서 매각 대금을 받기로 하였다. 매수인은 그의 친척들이 준 소 7~8마리를 몰고 장으로 왔는데, 그 모습을 보고 내 마음이 착잡해졌다. 비록 내 아버지의 땅이라 작고한 형제들 대신 매각을 하러 왔지만, 나는 이 땅에 대해서 농사를 짓지도 노력도 하지도 않은 채 쉽게 처분하여 돈을 받는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장날에 땅 매각대금을 수령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해방 직후인 1946, 내 나이 24세 때였다. 당시 국민학교 교사 월급이 100원이 넘지 않을 때였다. 그런 나에게 엄청난 자금이 들어온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억대의 돈을 20대 청년이 손에 넣은 셈이다.

(대한인의 방랑과 사랑, 유선익 저, 희망사업단, 서울 2015. 45~48)

 

이 엄청난 돈을 손에 쥐게 된 청년 유선익은 매일 술로 소일하며 46년에서 49년까지 탕진하였다. 여기서 아들의 실수가 드러난다. 노력하여 벌지 않은 돈을 젊어서 손에 쥐게 되면 이렇게 모두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몸소 깨닫게 된 것이다. 복권 당첨, 유산 상속 등의 불로소득은 철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겐 오히려 없는 것 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여기서 아버지의 지혜와 아들의 실수가 보인다. 어르신의 아버지는 훗날을 대비하여 블라디보스톡과 만주 등에 체류하면서도 전혀 연고가 없었던 경북 의성에 지인을 통해 땅을 구입한다. 당시 이 땅은 농지였기 때문에 농업이 주 생산 수단이었던 시대에 좋은 보험이 되었던 것이다. 최소한 식량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통도 불편했던 시절 지인이 송금한 돈을 떼어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토지를 매입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신뢰를 주고 합리적인 선에서 책임을 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소작인을 선임하여 계속 소작료를 지급받았으니 탁월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만일 어르신의 아버지께서 이북에 토지를 매입하셨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이 공산당에 다 빼앗겼을 것이다. 이렇게 전혀 체제도 환경도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것은 급변하는 세상을 대비하는 지혜이다.

 

▲     © 운영자

 

40년대가 끝나고 1950년이 시작되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어르신은 용산경찰서 옆 효창동에 거주하였는데 너무도 빠른 시일에 서울이 함락되어 미처 피난을 갈 생각도 못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북쪽에서 침입한 군대가 얼마나 빨리 쳐들어왔는지 3일 후인 28일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정부 중앙방송이 628일 전날 선전하여 말하기를, 정부군은 반드시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동요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대한인의 방랑과 사랑, 유선익 저, 희망사업단, 서울 2015. 50)

 

이렇게 국민들을 기만하고 퇴각한 이승만 정권을 믿은 대다수의 선량한 시민과 청년들은 그 말만 믿고 서울에 잔류하였다. 당시 월남하여 서울에 거주하였던 발해초등학교 동창들이 모여 시국 추이를 관망하며 의논하였다. 그러던 중 결정적 인연인 이일묵이란 후배가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시청 양정과에 근무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람을 전쟁 발발하기 전날인 50624일에 임승호란 친구집에서 만나서 안부도 물어보고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마포에서 저녁으로 고등어찌게 백반을 12그릇을 먹는 기염을 토하며 교제하고 헤어졌는데 이 사람이 남로당 활동을 하면서 숨어 다니느라 며칠을 밥도 못먹고 다녔다는 것을 모르고 한 호의였다.

 

그런데 공산치하의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며칠 뒤에 그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그가 서대문구청으로 어르신을 데리고 가서 구청장에게 인사를 시키니 그날부로 서대문구청 양정과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극적으로 서울에서 적응할 무렵 전쟁이 계속되면서 불안 불안한 나날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서대문구 신문로를 지나는데 두 사람의 청년의 실랑이에 끼어들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유명종/ 희망사업단 대표

재창간 2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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